비에이 후라노 투어 다음 날. 투어 다음날이라 피곤하기도 했고, 아침부터 잔뜩 흐리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선선하고 기분좋은 공기 속의 빗방울이 아닌, 여전히 후덥지근하고 눅눅한 공기 속의 빗방울. 그리고 처음으로 혼자가 아닌, 부모님을 모신 여행에서 생각보다 꽤 여러가지 상황들을 챙겨야 함에 여러모로 몸도 마음도 지쳐가기 시작하는 기분이 들었다. 원래의 계획은 숙소 근처의 가까운 시내 관광지들. 오도리 공원이나 티비타워 등을 천천히 걸어서 구경하고 쉬다가 오후즈음 오타루를 다녀와야지, 생각했었다. 워- 낙 더위를 어마어마하게 타는 엄마인지라 예상은 했었지만 예상을 초월하게 더 힘들어하는 엄마바람에 애초에 세웠던 일정들은 다 취소하고 실내에서만 있어야 할 판이었다. 게다가 삿포로는 원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시즌이 거의 없는 곳이라 우리나라처럼 더위를 맞이하는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었다. 에어컨 시설이라든지 냉방 정도라든지. 물론 나는 크게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워 -낙 조금만 더워도 예민해지는 엄마였기에 덩달아 나도 극도로 예민해졌다.
겨우 겨우 엄마를 구스르고 달래어 어찌어찌 삿포로역까지 도착했고 도저히 도보로 시내 관광은 무리겠다 싶어 그냥 무작정 셋이서 삿포로 행 기차에 올랐다.
기차를 타고 삼십분 즈음 달려 미나미 오타루 역에 내렸다. 비도 오고 잔뜩 안개가 끼어 엄마 아빠에게 보여주고 싶던 바다 풍경 같은 것들은 아예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어떻게 해야 힘들지 않게 이 일정들을 마칠 수 있을까 그 생각 뿐.
걱정대로 미나미 오타루 역에 내려 쭈욱 걸어 오르골당, 르타오 롯카테이 등등 상점등을 지나 오타루 운하까지 걸어가 오타루 역에서 다시 삿포로 행 기차를 타겠다는 나의 계획은 무리였다. 오르골당에서도 구경을 하는 듯 마는 듯 하고 바로 나와 맞은편 르타오 본점의 2층카페로 향했다. 엄마 말로는 여태껏 삿포로에서 가장 시원하고 쾌적했다는 그 곳에서 케잌 한 조각과 각자의 음료를 시키고 거의 우리 셋은 방전 상태로 앉아 쉬었다.
나 혼자서도 절대 무리하지 않고 다니는 편이기도 하고, 충분히 이 정도면 되겠지 너무 느슨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일정들 속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생기고. 또 엄마와 아빠의 성향과 취향, 스타일, 체력차이까지 가늠하며 눈치를 보다 보니 한 순간도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물론 나의 성격 탓도 있겠지만, 그 상황과 순간들 속에서 어떻게 해야할지를 늘 고민하며 지쳐가는 기분.
어떻게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다시 미나미 오타루 역으로 돌아가 삿포로행 열차를 타고 삿포로역 근처의 호텔 뷔페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돌아오는 길에도 비가 제법 내려 택시를 탔는데, 그 택시마저 숙소와 동떨어진 곳에 세워주신 바람에 한참을 보람없이 걸어야 했다.
지친 몸과 마음을 다독일 나만의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래서 엄마에게 잠시만 커피 한 잔 하고 오겠다고 나선 곳은 숙소 바로 앞의 카페 pool. 숙소 잡기 전부터 언젠가 인스타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가보고 싶어서 저장해 둔 곳이었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숙소와 겨우 한블럭 떨어진 곳에 있는 곳이었다.
비내리는 풍경이 보이는 창가 테이블에 앉았다. 어중간한 시간이라 그런지 카페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용한 카페에 재즈가 흐르고 빗소리가 간간히 들려오고.
원래 크림커피와 케잌, 이런 조합으로 잘 주문하지 않지만 이 날은 어지간히 지치고 단게 절박했나보다. 비엔나 커피와 호박 치즈 케이크.
보이는 모습과 같이, 예쁘고 맛있고 다 한 세트.
맛도 맛이지만, 이 날의 이 공간의 무드를 잊을 수가 없다. 치유의 에너지가 가득 차오르는 기분.
조근조근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동그란 눈에 단발머리를 한 사장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비지엠으로는 귀에 익숙한 보사노바 선율이 흘렀다.
다시 추스른 몸과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