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하루 한 글

경로 이탈이라니, 오히려 좋아

by 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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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빅, 경로를 이탈하여 재탐색합니다. 다른 길로 가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실은 운전 면허를 딴 지는 10년도 훨씬 넘었다. 하지만 장롱 면허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운전을 하게 된 지는 5년가량.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전 실력에는 크게 진전이 없다.

철저히 출퇴근 목적의 생계형 운전을 하기 때문이다.


늘 같은 경로의 길을 네비 볼 필요도 없이 길을 외워 하는 운전이 내 운전의 9할 이상이다. 낯선 장소로 출장을 가거나 여행을 갈 때에도 가까운 곳이거나 잘 아는 곳이 아니라면 (당연히)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네비를 보며 운전을 하는 멀티 플레이는 불가에 가까웠기에 네비게이션을 딱히 쓸 필요도 없었달까. 지금은 그나마 아주 조금 나아졌지만, 네비가 알려주는 경로를 미리 머릿속에 거의 외우다시피 하고서 막상 출발한 뒤로는 감에 의존해서 끙끙거리며 가는 사람이 바로 나이다.


그런 상황이다보니 효율적인 경로를 친절히 탐색하여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네비게이션의 간절한 안내를 본의 아니게 냉정하게 무시해버리는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다. 네비에게 실시간 경로 재탐색을 자꾸만 시키는 악덕 주인. 결코 한번에 결재를 해 주지 않는 최고로 피곤한 상사가 되고 만다. 그게 절대 의도적인 일이 아니라 변명하고 싶지만 내 네비게이션은 나의 이 진심을 알아줄까...


하지만 은밀히 고백하고 싶은 것이 있다. 사실 네비가 알려주는 경로를 이탈했을 때 네비게이션 화면에 새로운 경로를 탐색하는 동그라미가 빙그르르 돌아갈 때. 당연히 가야 하는 가깝고 효율적인 길이 아닌, 돌고 돌아 전혀 몰랐던 새로운 길을 따라 목적지로 향하게 되었을 때. 약간의 통쾌함과 해방감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나이를 이렇게 먹어도 청개구리 기질은 인간의 본능인건지. 일종의 소심한 일탈같은 것이라 이해하면 될런지.


실은 내 인생의 모습도 닮은 점이 꽤 있다. 최단경로를 거쳐 효율적인 방식으로 척척 흘러온 것은 아니었다. 이 길이 맞는지 전전긍긍하며 망설이다 꺾어야 할 지점에서 지나쳐버린 적도 있고. 당연히 지금쯤 도착해 있을 것 같은 목적지에 아직도 닿지 못한 채 내 또래의 친구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여전히 홀로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다. 언젠가는 이렇게 평생 홀로 쓸쓸히 흘러가는 것이 아닐까 서글퍼지기도 했다. 어쨌든 비슷한 길을 지나, 비슷한 경험을 하고 공감대를 나누는 여행객들과는 나는 다른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소위 말하는 정해진 루트와 인생의 어떤 지점들에서의 발달과업을 놓쳐버린 듯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발상의 전환이라 했던가. 정해진 루트와 인생의 발달과업을 착실히 해내며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나라는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일종의 '경로 이탈' 처럼 보이지 않을까. 출발역에서는 함께 몸을 싣고 떠났던 친구가, 이름모를 역에서 홀연히 내리더니 '난 나만의 길을 갈래, 안녕' 하고 총총 사라지는 모습으로 비춰질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나를 외로운 나그네처럼 볼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나를 자유로운 영혼의 존재로 부러워할 수도 있지 않을까.


경로를 이탈한다는 건, 그런것이다. 약간의 당혹스러움과 순간의 불안감을 꿀꺽 삼키고 나면 내가 미처 놓칠 뻔 했던 새로운 무언가를 보고, 듣고,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기회의 순간이 될 수도 있는 것.

오히려 좋아, 의 마음으로 받아주리라. 어차피 정해진 경로라는 것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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