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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시절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꽤 좋아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의 여러 장르 중에서 선호하는 (이라 쓰고 비교적 그리기 편하게 느껴지는) 그림과 어렵게 느껴지는 그림이 있었는데, 후자는 단연 수채화였다.
수채화는 시작부터 그림을 완성해가는 모든 과정들이 조심스럽다. 어차피 채색을 할테니 스케치를 대충 하고 색칠에 힘을 주자, 라는 마음으로 시작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수채화는 채색을 해도 스케치의 연필 선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아서 어설프게 대충 형태만 잡는 느낌으로 스케치를 하고 그렸다가는 이게 대체 무엇을 그린 그림인지 알 수 없게 느껴지거나, 채색을 할 때 내가 뭘 그린건지 알 수 없어서 길을 잃게 된다.
하지만 더욱 큰 고난은 채색을 시작하면서이다. 물의 농도에 전적으로 영향을 받는 그림이기에 조금만 물 조절을 잘못해도 공들여 스케치를 한 그림이 한강이 되거나, 저 멀리 원경으로 표현해야 할 부분이 마치 코 앞에 있는 것처럼 강렬해지고 만다. 어떻게든 수습하고 싶은 조급함은 오히려 그림을 산으로 가게 만든다.
물이 흥건한 부분에 황급히 붓을 꾹 눌러 닦아내면 표면이 지우개가루처럼 벗겨져 마르고 난 뒤 종이가 울게 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실수로 진하게 칠해버린 부분에 물을 듬뿍 묻힌 붓으로 문질러 보았자, 색은 조금이나마 옅어질 망정 여전히 실수의 흔적이 남아있는 캔버스에서 눈물처럼 주르륵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내 마음을 쓰리게 적신다.
사실 나는 알고 있다. 나의 조급한 마음을. 내가 저지른 순간의 실수를 어떻게든 수습하고 싶고, 어떻게든 지워내고 싶은 마음이 처음의 실수보다 더 나쁜 상황을 불러올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후회의 붓질을 멈출 수 없는 건 내 눈앞에 펼쳐진 이 불만족스러운 상황을 견딜수가 없는 것이다. 나름의 최선을 다했고, 부푼 기대로 행한 나의 붓칠이 내 기대와 어긋나기시작하는 순간 당황스러움과 실망. 어떻게든 그 감정들을 지워내고 싶은 욕심이 연이은 실수를 부른다.
덧칠은 그런 것이다. 실시간의 모습에서, 조금이라도 달라지고 싶은 마음. 과거의 흔적이 보이지 않게 덮어버리고, 할 수만 있다면 삭제해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뭐라도 덮어보는 마음.
비록 그 마음이 이끄는대로 행하였을 때, 마음처럼 잘 되지 않을수도 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발버둥 치고 애를 써보는 마음이라 생각하면 또 의미가 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은가.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열에 하나도 되지 않는 걸.
그러므로 가끔은 내 삶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에 덧칠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단, 너무 조급해하지 않으면서. 숨을 조금 고르고 한발짝 물러나 롱 샷으로 찬찬히 바라보면서. 적절한 부분에, 정확한 한 붓의 터치를 더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