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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시간 수채화 그리기를 위해 준비물을 챙길 때마다 가장 큰 부담은 팔레트였다. 붓, 물통, 물을 닦기 위한 수건 같은 것들은 사실 준비하는 것도 챙기는 것도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팔레트는 달랐다. 검정색으로 된 초등학생의 작은 한 손으로 들기에도 무거웠던 팔레트. 며칠 전 부터 미리 작은 칸칸마다 물감을 짜 놓고 완전히 말려야하는 것 부터 귀찮음의 시작이었다. 조금만 덜 말려도 들고 다니다보면 바로 옆 칸을 침범하기가 일쑤였다. 게다가 붓으로 색을 섞고 만드는 공간은 색칠 몇 번만 하고 나면 다시 새로운 색을 만들 공간도 없이 금새 채워지고는 했다. 닦아내기가 귀찮아 대충 비슷한 색이 있는 자리에 물감을 개어내다보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색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림을 다 그리고 난 후의 정리도 문제다. 깔끔하게 팔레트를 쓰기 전의 원래 상태로 깨끗하게 닦고 물기 없이 정리하지 않은 채로 아 몰라, 닫아 버리고 집에 왔을 때. 두근거리는 맘으로 팔레트를 여는 그 순간. 짜두었던 물감은 물론이거니와 팔레트 전체가 마치 혼돈의 아수라장이 되어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순간의 귀찮음에 굴복하여 맞이하게 되는 비통한 광경. 후회해본들 이미 내가 수습해야 할 상황이라는 것 외에는 달라질 것이 없다.
내 인생의 팔레트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미리 여러가지 색들을 짜 두고, 차분히 잘 말리고. 색을 섞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충분히 자유롭게 섞어보고 시도해보고. 그러면서도 또 그 다음의 새로운 시도를 위해 그 공간을 깨끗하게 닦아내고 다음을 준비하고.
그 모든 과정들을 귀찮아하지 않고, 정성껏 해내어야 한다는 것. 그 과정들이 그 다음 언젠가의 새로운 시도와 그림을 위한 준비가 될 수 있다는 것.
차분히 나만의 팔레트를 잘 관리하는 것이 내 인생의 다양한 그림들을 그릴 수 있는 밑거름임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