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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이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가방을 내팽겨치고는 뚜벅뚜벅 냉장고 앞으로 걸어간다. 박력있게 냉장고 문을 열자마자 마주하는 냉장고의 풍경은 마치 그 주인공이 현재 살아가고 있는 현생의 모습을 닮아있는 것만 같다. 가지런하고 정갈하게 정돈되어 산만하지 않게 채워져 있는 모습일 수도 있고, 정리라는 것을 논할 수도 없이 텅텅 비어 있는 모습일 때도 있다. 또한 언제 그 안에 들어갔는지도 모를 정체 불명의 것들이 꾸역꾸역 빈틈 없이 채워져 있는 모습으로 화면 밖의 나조차 한숨을 쉬게 만들 때도 있다.
냉장고라는 물건이 그렇다. 당장 먹지 않더라도 언젠가 내가 먹을 것들을 채워두고 보관하고 준비해 두는 곳. 때로는 나의 끼니가 되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나의 건강을 책임지기도 하며 가끔은 달콤하고 기분좋게 해주는 것들을, 언젠가의 나를 위해 저장해 두는 곳. 그 모든 것들은 결국 나를 챙기고 돌보는 일의 큰 부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당장 냉장고 앞으로 성큼 성큼 걸어 가 보자. 나의 냉장고 안에는 어떤 것이 어떤 모습으로 채워져 있을까. 척 하면 척하게 내가 원하는 것들을 언제든지 꺼내어 손에 쥘 수 있도록, 준비된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저 텅 - 빈 공간 속에서 냉기만이 가득 채우고 있을까. 오래 전 언제부터 그 공간 속에 있었는지도 모를 것들이 짐덩이처럼 골치아프게 내 마음을 더 갑갑하게 만들고 있을까.
지금 당장 내 삶이 처량하고 무의욕하고 서글프게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당장 냉장고부터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 보자. 신선한 제철 과일도 채우고, 언제든 뜨끈하게 데워 먹을 수 있는 끼니 거리들도 넣어 보자. 울적한 날 숟가락으로 퍽퍽 떠먹을 수 있는 달콤한 아이스크림도 한 통 넣어두고 짜증이 폭발하는 날 시원하게 울분을 식혀 줄 캔 맥주나 탄산음료도 두어개 쯤 채워 두고. 그러다보면 제법 나를 잘 돌보며 살고 있다는 기분이 조금씩 차오를지도 모르니까. 스스로를 잘 돌보고 있다고 느끼는 방법은 그리 멀리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바로 냉장고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