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이라는 이름의 숨구멍

by 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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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시절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그릴 때마다 나는 조바심이 났다. 새하얀 종이 위에 슥슥 밑그림을 그리고 난 뒤 채색을 시작하는 순간. 그 순간부터 나의 마음은 얼마나 잘 표현하는가에 집중하지 못하고 어서 이 색이 비어있는 하얀 종이를 무언가 색채를 지닌 것으로 채워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특히 수채화의 경우에는 이런 마음이 그림을 더 마음에 들지 않게 만들어버리고는 했다. 수채화의 특성 상 밑바탕이 되는 거의 투명에 가까운 연한 색의 층을 종이에 먼저 칠한 뒤 충분히 마를 때 까지 기다린다. 그리고 또 그 위에 더 짙은 색을 쌓고, 또 점점 짙은 색을 덧칠하며 표현의 감도를 높여가는 식이다.

하지만 그런 과정 속에서 늘 겪게 되는 난관이 있었다. 빛이 반사되는 부분이라던지, 거의 백색에 가까운 채로 그대로 두어야 더 생생히 표현되는 부분들 조차도 나는 어떤 색이든 채우려고 애를 썼다. 손이 닿지 않는 하얀 공백은 마치 미완성을 의미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나의 마음으로 완성된 그림은 그저 빠짐없이 채색된 종이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창문이 꼭 닫혀있는 방 안에 갇혀버린 기분. 시선이 닿는 어디에도 내 눈과 마음이 머물러 숨을 고를 수 있는 숨구멍이 존재하지 않았다.

살다보면 우리의 삶 곳곳에서 발견되는 여백들이 있다. 빼곡하게 책이 꽂혀있는 책꽂이에서 비워진 책 몇 권의 빈 공간. 사람이 가득 찬 카페의 한 구석에 비어있는 테이블. 달력의 새카맣게 이어지는 날짜들 속에서 마치 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는 듯한 빨간 색 숫자의 휴일들.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 가지 사이로 새어져 나오는 햇살의 무늬 같은 것들.

사실은 그런 크고 작은 틈, 공간, 구멍.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삶에서 꼭 필요할지도 모른다.

여백이라는 이름의 숨구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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