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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배 Mar 09. 2021

미드나잇 인 파리

영화:Let’s fall in love

 어제는 올해 들어 가장 고된 하루였다. 예약했던 결혼식 장소에서 결혼 2주 전에 갑자기 계약 조건을 변경하고는 따르지 않으면 예약금을 돌려줄 테니 다른 곳을 알아보라고 했다. 변경한 계약 조건은 결혼이라는 일생일대의 행사를 인질로 잡아 눈먼 돈을 요구하면서, 음식은 형편없이 내보내겠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가족 친지들만 모시고 하는 작은 결혼식이라 웨딩 업체를 통하지 않았고, 인사동의 작은 식당을 예약했었다. 식당 측에 모든 계약 내용은 명시화되어 있으니 내용 증명을 보내겠다고 했다. 그제야 대표 이사라는 사람은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답을 보내왔다. 결혼식 준비로 정신없던 토요일 일정을 모두 마친 뒤였다. 대표를 만났고, 해결점을 찾기 위해 서로의 잘잘못을 가렸다.

 다행히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예상치 못한 갈등 상황에 사방팔방 뛰어다녔더니 다음날인 오늘까지도 몸과 마음이 무언가에 졸려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좁은 깡통에 들어가 뚜껑이 덮여 숨이 막히는 그런 기분이었다. 사과를 3번은 받고, 성심성의껏 준비한다는 다짐을 받고 왔지만 여전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도 결혼 막바지 준비로 해야 할 일정이 꽤 있었지만, 마음을 좀 정돈하기 위해 지인들에게 양해를 구해 일정을 취소하고 집에서 쉬기로 했다. 결혼이 2주 앞으로 바투 다가온 상황에 큰 고비까지 한 차례 넘겼더니 마음과 기운이 영 동난 듯하다.  

 나는, 모든 일정을 취소한 이 주말 하루 동안 어떻게든 결혼이라는 폭풍 전야의 긴장으로부터 나를 분리해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좋아하는 동네 찜닭 집에서 부드러운 순살 찜닭 반 마리를 전투적으로 주문했다. 그리고 애지중지 기르는 나의 첫 식물, 몬스테라에 시원한 물도 흠뻑 주고, 창가에 올려 조금 이른 봄볕도 쐬어 주었다.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고, 조용히 곁을 정돈하는 일은 평화롭기도 하고, 안도감을 주기도 한다. 곧 집 앞 천변에 나갔다. 집 앞의 작은 하천은 벚꽃이 피면 참 예쁜 곳이다. 내내 추웠던 겨울이 이제는 정말 가버렸는지 살결에 닿는 바람이 따뜻하고 부드럽게 느껴졌다. 천천히 길을 따라 걸어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티라미수 한 조각을 포장해왔다. 이제야 어제의 긴장이 슬슬 풀리는 듯했다.

 나는 불쑥 지금 이 순간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로 꽉 채워 보자는 생각을 했다. 이미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몇 가지 챙겼으니, 약간의 부지런함만 발휘한다면, 꽤 그럴듯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우선, 카페에서 사 온 티라미수 케이크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햇살이 드는 창가에 펼쳐 놓았다. 그리고 넷플릭스를 켜고, 아주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틀었다. 우디 앨런의 영화는 내용도 좋지만, 보는 내내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으로 눈과 귀가 호강할 수 있다. 나는 그의 작품 중 유독 <미드나잇 인 파리>를 좋아하는데 이 작품에는 예술의 황금기인 1920년대를 갈망하는 젊은 작가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인 파리를 맘껏 누비기 때문이다. ‘예술의 황금기인 1920년대를 갈망하는 젊은 작가’가 주인공인 점에서 유독 감정 이입이 된다. 거기에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콜 포터의 음악 “Let’s do it”까지, 나에겐 정말 사랑스러운 영화이다.

  영화의 주인공 길 펜더는 늦은 밤 파리의 거리를 걷다가 길을 잃고, 우연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자동차’를 얻어 탄다. 자동차는 골동품 가게에나 전시되어 있을 법한 차였는데, 이 차가 데려다준 곳은 다름 아닌 1920년대의 파리이다. 여기서 자동차는 일종의 타임머신의 역할을 한다. 그렇게 도착한 파리에는 1920년대 가장 아름다운 여인 ‘아드리아나’가 있다. 길 펜더는 그녀에게 한눈에 반하고, 그녀가 그리워하는 또 다른 이전  황금기인 벨 에포크로 ‘마차’를 타고, 그녀와 함께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1920년대의 그녀는 1800년대 후반 벨 에포크 시대의 석판 화가를 존경하는데, 그를 만난 자리에서 폴 고갱과 드가도 만나게 된다. 뜻밖에도 고갱과 드가 역시 그 시대의 사람들이 공허하고 상상력이 없다며 그보다 더 이전인 르네상스를 황금기라며 그리워한다. 영화는 ‘끊임없이 과거를 그리워하는 예술가들의 모습’을 시간 여행하는 주인공과 그가 만난 예술가들을 통해 보여준다. 모두에게 각자가 생각하는 황금기는 다른 셈이다.  

 영화를 보다가 나는 문득 내 인생의 황금기는 언제일지 생각해보았다. 그리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보면, 입시 생활에 지친 고등학교 땐 맘껏 풀밭에서 뛰놀던 초등학생 시절을, 성인이 갓 된 대학생 땐 친구들과 교실에서 종일 붙어 지내던 학창 시절을 그리워했다. 어느새 서른 셋이 되어, 결혼을 앞둔 나는 자유롭게 세계를 유랑하며 지내던 20대 중반의 나를 그리워한다. 이쯤 되면 인간이란 본래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인가 싶다. 아마도 먼 훗날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한다면 모든 생활이 스스로에게 맞추어져 있는 지금 이 마지막 미스 시절을 가장 그리워할지도 모르겠다. 인생이라는 것이 항상 즐거울 수만은 없고, 바이오리듬의 곡선처럼 주기적인 높낮이를 가지는 듯하다. 내가 황금기라고 생각하는 나의 20대 중반 역시, 타지에서의 지독한 외로움에 아프기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을 열렬히 좇으며 절망하기도 했으며, 그 와중에 정신없는 생활에 치여 지치기도 했다.

 어쩌면 미래의 ‘나’는 2021년 현재를 나의 ‘황금기’로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듬직한 반려자를 만나고, 언니와 오빠가 한 명씩 더 생기고, 다정한 엄마 아버지가 한 분씩 더 생긴 시절이자, 바쁜 만큼 직업적으로 성장을 이룬 시간. 이 모두가 미래에는 그리울 것이라 생각하니 힘들게만 느껴졌던 최근의 며칠이 괜찮게 느껴졌다. 내가 그리워하던 그 옛날의 어느 날도 늘 이만큼 힘들기도, 지치기도 했다. 인생이란 것이 늘 밝은 빛만을 가질 수는 없다. 때로는 행복으로 충만한 반짝거리는 색이 있기도 하고, 또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 바닥을 모르고 침전하는 어둠의 색도 있을 것이다. 각각의 색이 모여 우리의 인생을 채색하고, 언젠가는 이 색이 한데 모여 일곱 빛깔의 아름다운 무지개를 이루게 될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고 나니, 아무튼간에 해결된 어제의 갈등이 별 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시절에나 갈등은 있고, 지금 이 시절을 먼 훗날 꽤 그리워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부드러운 찜닭을 먹고, 햇살 좋은 날 여유롭게 하천 주변을 걷고, 향이 좋은 커피를 마시며 평온하게 좋아하는 영화를 본 이 일요일 하루가 여러 해가 지난 뒤 내가 그리워할 또 다른 황금기로 기억될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어제 하루와 충분히 단절될 수 있었다. 고단했던 어제와 분리되어 보자는 영화 감상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 셈이다. 새로 시작하는 주는 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막막하지만, 이 주말이 끝나기 전에 통통 튀는 콜 포터의 Let’s do it이나 큰 소리로 듣고, 힘을 내야겠다. 힘내서 결혼을 해야지.

“Let’s do it, let’s fall in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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