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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배 Mar 12. 2021

일상의 조미료

코로나 시대의 국내 여행

 결혼 전 엄마와 남자친구가 친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인제의 노천욕을 즐길 수 있는 곳에 가기로 했었다. 제주에서 자란 엄마는 바다의 습이 찬 공기와 해산물을 좋아한다. 그래서 속초에서 만나 엄마가 좋아하는 물회 식당에서 밥을 먹고 인제로 넘어오기로 했지만, 엄마는 전날 먹은 고기 짬뽕으로 단단히 체했고, 결국 이 여행은 나와 남자친구의 둘 만의 몫이 되었다.


 지난 연말 동해와 남해를 무작정 다녀왔다. 남해는 상대적으로 잔잔하고 옅은 파스텔 톤이지만, 동해는 새파랗고 파도의 일렁임도 거세다. 남해가 잔잔하다 해도 여전히 겨울 바다의 찬 공기는 함께였고, 동해 바다는 늘 그렇듯 시퍼렇고 굽이치는 파도였기에 지난 여행 동안 바다의 에너지에 약간은 지쳤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렇다면 굳이 바다에 갈 것 없이 ‘숲’으로 바로 들어가자고 우리 둘은 입을 모았다. 바다의 흘러넘치는 힘 말고, 태백산맥의 한 줄기, 호랑이의 허리춤에 있는 역동적이지만 한자리에 우뚝한 산으로 가보는 거다.  


 최종 목적지는 이렇게 정해졌지만 숙소도, 저녁도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가는 길에 급히 평점 8점 이상의 호텔을 예약했다. 그리고 인제는 메밀 막국수가 유명하다기에 인제 IC 근처의 식당을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로 설정하고는 이야기를 나누며 열심히 달렸다. 즉흥적인 여행이었지만 꽤 수월하게 진행되는 듯하다며 둘은 한껏 들떴다. 그리고 오른편 톨게이트로 나가는 길을 자연스럽게 놓쳤다. 우리 둘은 배가 고팠고 울상을 지었다. 지나친 순간, 도착 시간이 35분이나 늦춰졌기 때문이다. “망했어, 오빠..” 대충 다른 식당으로 갈까 해서 연락해 보았는데 모두 문을 닫거나 닫을 거라는 응답들이 돌아왔다. 어쩔 수 없이 본래 가기로 했던 식당에 연락을 하니 8시까지 운영하니 7:20분까지 도착한다면 기다려 주겠다고 했다. 예상치 못한 데드라인에 바짝 긴장감을 느끼며 목적지와 멀어지는 고속도로를 열심히 달렸다. 여기에서 밥을 먹지 못하면 꼼짝없이 편의점 김밥 신세였다.


 인제 IC에서 서양양으로 가는 길은 여태 달려온 고속도로와는 다르게 산 고갯길을 넘어야 했다. 인제에서 약간씩 흩날리던 비는 고갯길을 오를수록, 귀가 먹먹해질수록 폭이 넓은 눈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종종 눈 내리는 고갯길을 넘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 한계령에 발 묶여 누구에게도 구조 요청을 하고 싶지 않다는 조금은 살벌한 문정희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를 읊으며 키득거리곤 하는데, 이건 정말 강원도 고갯길에 사랑하는 이와 발 묶여 구조용 헬리콥터를 마주하게 될까봐 등골이 오싹했다.


 운전에 능숙한 남자친구 덕분에 안전하게 예상 시간 4분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화를 주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음 문 닫고 들어갔을 거라는 무뚝뚝한 말과는 달리 도착하자마자 따뜻한 물을 주시는 사장님과 종업원이 우리를 반겼다.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메뉴라도 잔뜩 시키려 했지만, 메뉴가 단 3개뿐이었다. 메밀 막국수, 보쌈, 감자전. 우선 종류별로 하나씩 주문했다. 일단 시키고, 이후에 부족하면 더 시키자는 생각이었다. 주문한 음식은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빠르게 나왔다. 먼저 겨울 배추, 상추, 보쌈, 호박전이 등장했다. 감자전이 3천원이었는데, 서비스로 나온 호박전이 그럴 듯해서 주문한 감자전인 줄 알았다. 곧 커다랗고 윤기 나는 감자전이 보란 듯이 나타났고, 메밀 함량이 높아 보이는 쫀쫀한 막국수가 등장했다. 이외에도 배추 겉절이, 명이나물 한 움큼, 갓김치, 무생채 등은 마치 ‘내가 바로 인제의 자랑이다.’하는 것처럼 제각기 존재감을 뿜어냈다.


 길을 잘못 들어 혹시라도 이곳을 들르지 않았다면 아쉬울 뻔했다. 양념 맛보다 강하게 느껴지는 깨끗한 메밀 맛에 감탄하고, 쫀득한 보쌈의 식감과 아삭한 백김치에 혀를 내둘렀다. 나는 큰 목소리로 “여기 정말 맛있다! 우리 엄마랑 꼭 다시 오자! 속초 가는 길에도 들르자!”를 구가했다. 그리고 다음날 호텔에서의 한 끼를 제외하곤 모두 막국수를 먹었다. 인제에 온 지 30분도 안 돼서 인제의 숲, 산, 밭의 맛을 모두 본 것 같았다. 한 입에 그 수확 과정과 노력이 느껴지는 맛이었다. 모든 식재료들이 자연의 맛 그대로를 적극적으로 내고 있었다.


 맛있는 밥을 인심 좋게 먹고, 대강 찾아 예약해 놓은 숙소로 들어왔다. 호텔은 생각보다 컸고, 경주용 환상 도로라고 불리는 커다란 레이싱 서킷이 숙소 밖에 있었다. 거기에 건물 내부 곳곳엔 파란색, 분홍색 레이싱 카가 전시되어 있었다. 방에서 역시 산과 레이싱 서킷이 뷰로 보였는데, 굉장히 크고 넓어서 전문 레이서들이 시합 때만 와서 이용하는 곳인 줄 알았지만, 다음날 아침 실제로 차들이 달리며 내는 소리에 아침을 맞이하며 깜짝 놀랐다.


 다음날 아침, ‘시잉~’ 하는 소리에 눈을 떴다. 커튼을 치니 산에 나무가 보송보송 나있는 모습이 보였다. 맑은 하늘 아래, 저 서킷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흉물로 보였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1~2대였던 개조된 자동차들이 늘어나더니 줄 지어 저마다의 속도를 자랑하며 달렸다. 남자친구에게 들어보니 일반인들이 하는 일종의 취미 생활인데, 이렇게 한 시간 속도를 내서 달리면 1백만 원 가량의 돈을 쓰는 거라고 했다. 단 몇 분에 13kg의 기름을 쓴다고 했는데, 그렇게 몇 바퀴를 돌고 마친다고 한다. 그 뒤로 달리는 차들을 보니 현금을 뿌리는 자동차들로 보였다.


 나도 탱고를 취미 생활로 춤을 추러 다닌 지 벌써 5년이 훌쩍 넘었다. 이 취미 생활도 꽤나 열정이 있어야 가능한지라 남 모를 뿌듯함이 있었는데 이곳에 오니 이곳 사람들의 열정도 대단하구나 싶었다. 매주 강원도까지 와서 서킷을 달리는 사람들의 열정, 레이싱 속도, 그리고 비장하게 차에 타는 그들의 승부욕을 상상해 보곤 피식 웃음이 났다. 흉물로 보이던 서킷이 그들의 열정을 담은 장소로 보이기 시작했다.


 우연히 산으로 와서 인생 막국수를 만나고, 타인의 취미 생활을 관전하는 입장이 되기도 하고, 뜻밖의 강원도 고갯길을 등골 오싹하게 달렸다. 모든 게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문득 ‘그래, 이 정도 새로운 경험이면 이번 여행도 대성공이야.’ 싶었다. 매년 가장 한가한 시기인 겨울에는 방콕으로, 발리로, 파리로 최근 한 3년 간은 늘 해외 여행을 다녔기에 올해 국내 여행은 모두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드디어 뭐 여행이 뭐 별거냐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남자친구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새로운 경험을 하면 국내든 국외든 무슨 상관이냔 말이다. 외국어가 들리는 생경한 장소만을 ‘여행’으로 여겼던 과거의 나와는 사뭇 다르다. 먼 나라의 여행이 아니어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여행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밥을 먹고, 가져간 책을 실컷 읽다가 자작나무 숲에 도착했는데, 코로나 감염 예방을 위한 ‘입산 금지’ 팻말이 보기 좋게 산을 지키고 있었다. 주변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뒤꿈치가 아쉬운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우리도 주차장 근처의 산 초입을 걸었다. 이 아쉬운 마음을 물 묻은 풀 냄새가 달래주었다. 산 공기를 입에 넣어 오물오물 십어 보기도 하고, 차가워진 볼을 꼼지락거리며 만져 보기도 했다. 언덕을 조금 더 오르니 작은 자작나무 무리가 있었다. 커다란 숲속에서 눈이 잔뜩 올려진 하얀 자작나무를 볼 거라는 예상과는 달랐지만 오히려 사람이 거의 없는 곳에서 나무 냄새를 맡는 일이 더 행복하게 느껴졌다. 오빠도 추웠는지 얼굴이 하얗고 빨갛게 색을 입었다.


 고개를 들어 파란 하늘을 보니 하얗고 곧은, 하지만 줄기가 얇은 자작나무가 연약한  건강하게 서있었다. 한참을 하늘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우연히 찾아간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타인의 취미 생활도 흥미롭게 관전하고,  닫힌 자작나무  근처의 자작나무 언덕에서 행복하게 하늘을 바라보는 .  정도면 이번 국내 여행도 충분했다. 엄마와 오빠가 가족이 되어가는 시간은  여행 외에도 여전히  필요하겠지만, 이렇게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낸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다. 평범하고 단조로운 일상에 ‘우연이라는 조미료를 뿌린 이번 여행, 가끔은 이렇게 무계획의 여행도 종종 다녀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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