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야기
“너는 어쩜 그러니. 제주도 여행을 가면서 엄마 생각은 쏙 뺀다니. 그래도 명색이 엄마 고향인데 엄마랑 갈 생각을 먼저 했어야지. 나참.”
엄마는 내가 단짝 친구와 스무 살 기념으로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자 몹시도 서운해했다. 내가 어딜 가서 무얼 하든 엄마는 스스로를 자유방임주의자라 칭하며 우리 딸 하고 싶은 거 다 하라던 사람이었다. 출발 전 여행 간다고 숙소며 동행 친구며 모두 전했는데, 여행에서 돌아와 가방을 풀자마자 불쑥 나온 엄마의 반응에 아찔하고 당혹스러웠다. 이미 여행을 다 마친 뒤에나 이런 이야기를 하다니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지만, 정말로 뒤통수 맞은 기분은 엄마 생각은 쏙 빼버리고 여행을 떠나버린 막내딸에게 엄마가 받은 기분이었을 거다.
나는 엄마가 고향 제주를 다시 가고 싶어 한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 우리 삼 남매는 겨울방학 때마다 서귀포 외할머니 댁에 달포씩 다녀오곤 했는데, 그때도 엄마 아빠는 일 때문에 늘 서울에 남아있었다. 우리 삼 남매는 서귀포에 갈 때면 동행자 없이 셋이서만 손을 꼭 잡고 비행기 맨 앞자리에 쪼르르 앉았다. 예쁜 스튜어디스 언니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바다를 건너면 막내 이모가 공항에서 우리를 반겨주었다. 아빠는 비행기 타는 걸 싫어한다고 했지만 엄마는 여행을 좋아했고, 비행기를 탈 때면 늘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지만 엄마는 우리와 동행하지 않았다. 김포공항에서 밝게 손을 흔드는 엄마를 보며, 어린 ‘나’는 엄마가 고향 제주에 자주 가지 않아도 정말 괜찮은 줄 알았다.
엄마에게는 한동안 두툼한 두께의 모니터 속의 다음 카페를 얼마 간이고 들여다보던 시기가 있었다. 나는 엄마가 업무 관련 서류 작업을 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엄마는 웹상에서 만난 친구들과 ‘비바리’라는 별명을 사용해 가족 이야기, 일 이야기들을 시시콜콜하게 주고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쩔 땐 연꽃 잔뜩 핀 두물머리에 가서 사진을 찍어 오기도 하고, 인사동 찻집에 다녀와 시인 친구를 사귀었다며 자랑하기도 했다. 그런 엄마가 영 수상하던 나는 엄마에게 “엄마, 요즘 어떤 사람들을 어떻게 그렇게 만나고 다니는 거야? 요즘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데 설마 인터넷에서 사귄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고 다니는 건 아니지? 요즘 번개로 모임 갖고 그러면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가 그렇게 많대.”라며 걱정으로 위장한 잔소리를 했다.
한참을 듣던 엄마가 발끈했다. 그 친구들은 엄마가 우리를 낳은 뒤 엄마를 ‘ㅇㅇ이 엄마’가 아닌 ‘정란이’로 불러주는 유일한 친구들이라고 했다. 비록 사는 곳도, 일하는 분야도 모두 다르지만, 모두 61년생 소띠로 같은 시절 학교를 다니고, 비슷한 시절에 아이들을 낳고 키워 이제야 자기 삶을 찾은 ‘엄마들’이라고 했다. 엄마와 온라인 친구들은 이미 닉네임이 아닌 서로의 실명을 부르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발끈한 엄마는 속사포로 자기 변호를 했고, 말은 입 밖으로 나올수록 엄마의 감정을 격앙시켰다. 결국 이야기는 아빠를 만나 육지에 정착했던 처녀 적은 물론이고, 물질을 하며 바닷속에서 소라와 고동을 따 올리던 어느 어린 날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 줄 거라고 여겼던 하나뿐인 딸이 자기를 그렇게 나쁜 짓이나 하고 다니는 사람으로 몰아세우니 비참하고 서럽다며 엄마는 어린 아이처럼 울어버렸다.
엄마는 어릴 때, 여자가 무슨 교육이냐며 학교에 못 나가게 했던 외할아버지 때문에 서귀포시에서 제주시까지 매일 몇 십 키로를 버스를 타고 몰래 고등학교를 다녔다. 외교관이 되고 싶었던 엄마는 학생 회장을 하며 차근차근 준비해 대학교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을 낼 형편이 되지 않았다. 당시 담임 선생님은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간호학과로 지원하라고 했다는데, 엄마는 끝까지 외교관의 꿈을 접지 않았다. 결국 엄마는 담임 선생님이 지원해주신 학비로 딱 한 학기 대학 생활을 한 뒤, 학비를 벌기 위해 서울 이모 할머니 댁으로 바다를 건너왔다. 학비를 벌러 서울에 간다니 딸린 여동생들은 반기를 들었지만, 엄마의 더 넓은 세계에 대한 꿈과 동경을 막을 순 없었다. 그리고 엄마는 이모 할머니 댁 맞은편에서 일하던 아빠를 만나 연애하고, 결혼했다. 큰오빠를 낳고, 우리 쌍둥이를 임신한 엄마는 더 이상 공부를 할 수 없었다.
엄마는 서울로 터전을 옮긴 뒤 대부분의 고향 친구들과 연락이 끊겼다. 친구 없인 못 사는 아빠가 매주 동창들을 만나러 가는 것과는 달리, 엄마는 단 한 명의 고향 친구도 만나지 못했다. 그나마 한 명 정도 연락을 주고 받는 친구가 있긴 했지만 그마저도 전주에서 지냈기 때문에 실제로 만난 일은 일체 없었다고 했다. 엄마는 주말이면 동창을 만나러 가는 아빠가 항상 부러웠지만,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아빠에게는 아빠 곁에 정착한 엄마가 자식을 돌보며 가족에게 고립된 삶을 사는 것이 당연했고, 엄마 역시도 별 다른 의문을 품지 않았다. 꿈을 찾기 위해 나온 육지에서의 삶은 결국 ‘자식들’로 귀결되었다. 그런 엄마의 마음 한 켠에는 등지고 온 고향에 대한 말 못 할 그리움이 있었던 것이다. 엄마는 20년이 지나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야 속마음을 내놓기 시작했다.
내가 태국에서 근무할 때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수업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엄마의 이메일 아이디이자 오랜 닉네임인 ‘비바리’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수업 자료로 등장한 단편 소설의 제목이었는데, ‘비바리’의 의미는 내가 생각한 의미와 전혀 달랐다. 나는 ‘비바리’가 쏘다니기 좋아하는 ‘발바리 강아지’ 같은 의미의 단어일 거라고 대강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바리’는 내 예상과 달리 ‘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건강한 제주 처녀’라는 뜻이었다. 무릎을 탁 쳤다. 이제야 엄마의 카페 닉네임이며 이메일 주소 모두 ‘비바리’였던 이유를 알아차렸다. 대문짝하게 써놓은 엄마 도메인의 의미를 지금에야 알다니, 참 무지하고 무심했다. 그제야 나는 특별한 날 외식을 할 때면 늘 해산물을 외치고, 나물 반찬만큼이나 해초 반찬이 많았던 우리집 밥상, 그리고 겨울이면 ‘진짜’ 바다를 보러 가자는 엄마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엄마는 단 한 순간도 바다를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비행기를 타고 바다 건너 방콕에 놀러왔다. 엄마는 굳이 당신을 위해 시간을 빼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엄마는 먼길을 고추장과 깻잎 장아찌, 그리고 각종 인스턴트 미역국, 된장국과 내가 부탁한 한국어 책 3권을 들고 왔다. 전라도도 경상도도 아닌 태국으로의 방문이었다. 나는 휴가를 내고, 엄마와 함께 할 여행 일정을 짰다. 엄마와 제주 여행을 못 간 20대 초반의 기억 이후로, 마음 한 켠에는 항상 바다 여행만큼은 엄마와 함께 해야겠다는 마음의 빚이 있었다. 나는 이 빚을 갚겠다는 심산으로 깨끗하고 조용한 섬 투어 일정을 짰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바다 위의 통나무 집을 숙소로 예약했다. 엄마가 좋아하는 싱싱한 해산물을 잔뜩 먹을 작정이었다.
방콕 인근의 작은 섬 ‘꼬란’에 도착하자 관광객을 대상으로 장사하는 삼륜 오토바이 ‘뚝뚝이’의 운전수들이 우리를 두고 앞다퉈 가격 흥정을 했다. 현지 물가에 비하면 터무니 없는 가격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엄마와 여행 중인 내가 관광객 신분임을 상기하며 흔쾌히 바가지를 썼다. 이미 해가 지기 시작해 석양이 바다에 그득할 즈음이 되어서야 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섬 안에서 가장 유명한 해변에 도착했는데 공교롭게도 아무도 없었다. 알고 보니 우리가 도착했을 시간은 이미 섬 안에 사람들이 뱃시간 때문에 모두 육지로 돌아가는 배를 탔을 때였고, 섬 안에 묵는 이는 적어서, 해변 문 닫기 30분 전에는 뒤늦게 도착한 우리들밖에 없었던 것이다.
엄마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바다로 들어가 첨벙첨벙 물장구를 쳤다. 엄마와 단 둘이 하는 바다 수영은 처음이었다. 석양은 뜨겁고, 벌겋게 바다를 뒤덮고, 우리 둘의 웃음 소리만이 물결에 반사되는 듯했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잦아들고, 엄마와 나 둘만이 빛나는 것 같았다. 엄마는 바다에서 누구보다 반짝였다. 엄마의 웃음은 봄날의 따스한 햇볕 아래서 높고 소박하게 흔들리는 청보리밭의 보리처럼 아름다웠다. 엄마는 태국의 어느 바다 한 가운데에서, 나와 함께 가장 반짝이는 함박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제주 비바리였던 엄마에게 바다는 꿈을 위해 건너야 했던 길이자, 건너버린 뒤에는 남 몰래 평생을 그리워했던 공간이다. 세계를 누비는 외교관이 되자고 바다를 건넌 뒤, 당신의 가족이 생기고, 자유롭고 꿈 많던 학생회장의 모습 없이 ‘엄마’가 되어버린 엄마. 엄마는 붉은 노을 아래 소금 냄새 폴폴 나는 태국의 바다에서 오랜만에 천진하게 웃던 어린 ‘정란이’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가족을 위해 엄마는 ‘과거’와 ‘미래’를 모두 놓을 수밖에 없었지만, ‘현재’만큼은 저 천진한 미소처럼 아름다운 기억들로 채워지면 좋겠다. 딸과 좋아하는 해산물을 실컷 먹고, 앞으로 어떻게 자식들을 키워야 할지 전전긍긍하는 것 없이, 맘껏 웃고 즐기며, 여태 쌓인 구김살을 눈 부시게 예쁜 미소로 곱게 펴는 시간들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