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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배 Apr 27. 2021

나의 달님

외할머니 이야기

 오늘은 외할머니의 생일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묻는 숙제가 있을 때면 퀴리 부인도, 나이팅게일도 아닌 외할머니의 이름 석 자 ‘양복순’을 적었다. 제주 외가댁에 갈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잡채를 만들어 주시고, 만화 가게에서 만화책도 실컷 보게 해주는 외할머니가 좋았던 것도 있지만, 엄마가 외할머니를 존경하는 마음을 그대로 전해받은 거 같기도 하다. 엄마는 외할아버지에게는 미움을, 외할머니에게는 존경심을 품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두 살 터울의 같은 국민학교를 다닌 선후배 사이였다. 외할머니가 한창 공부를 더 해야 할 국민학교 4학년 때 제주에 난리가 나 외할머니는 더 이상 공부할 수 없었다. 그런 외할머니에게 외할아버지는 무식하다며, 못 배웠다며 늘상 상처 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엄마 칠 남매에게 당신의 ‘못 배운 설움’을 그대로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4남 3녀를 모두 공부시키려는 외할머니와 달리, 외할아버지는 강경하게 딸 자식들의 교육을 반대했다. 여자는 배우지 못해야 가정에 순종적인 사람이 된다는 논리였다. 그래서 맏딸이었던 엄마의 ‘공붓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엄마는 외할아버지의 반대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4년 후에나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중고등학교 의무 교육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학교에 가까스로 들어와 공부하는, 나이 많은 학생들이 많았다고 한다. 네 살 터울의 동생인 이모가 중학교에 입학해야 할 무렵까지 외할아버지의 ‘딸 교육 반대’가 이어졌다.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 몰래, 서귀포 집에서 몇 십 키로나 떨어진 제주시의 중학교에 엄마와 이모를 같은 학년으로 입학시켰다.


 학교에 막 입학했을 무렵, 엄마와 이모는 외할아버지의 눈을 피해 외할머니가 돌담 밖으로 던져준 가방을 챙겨 도망치듯 학교에 다녔다. 엄마는 네 살 동생인 이모와 같은 반에서 공부하는 게 자존심 상해 늘 이모와 따로 다녔다고 한다. 그래도 엄마와 이모는 외할아버지라는 적군을 피해 도망 다닌 가장 친한 ‘전우’이자 가장 오랜 우정을 쌓은 ‘친구’였다. 매일 같이 시(市)를 넘나드는 등하굣길을 어린 엄마와 이모가 감당하는 게 심란했던 외할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둘에게 작은 자취방을 구해주었다. 급기야 엄마가 고등학생이 되자 외할머니는 제주시로 가족 전체의 이사를 감행했다. 처음엔 노발대발했던 외할아버지도 이쯤 되면 포기 지경에 이르렀고, 그렇게 엄마와 다른 남매들 모두 안전하게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엄마는 외할머니의 ‘현명함, 실행력, 용기’를 존경했다.


 그런 외할머니가 지병으로 오래 앓다가 10년 전 돌아가셨을 때, 엄마는 신발장 바닥에 주저 앉아 엉엉 울었다. 어린아이처럼 작게 웅크린 엄마는 고개를 숙이고 내게 안겨 한참을 울었다. 아마도 엄마를 그렇게 오래 안고 있었던 날은 그날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늘 내 편이었던 외할머니를 볼 수 없다니 슬펐다. 거기에 엄마가 ‘엄마를 잃은 상실감’이 내게 그대로 전해져서 또 슬펐다. 우는 엄마를 안아주며 나는 ‘엄마가 죽으면 어떤 슬픔일까’를 생각하며 엄마의 슬픔을 상상해보기도 했는데 도통 가늠이 되지 않았다. 엄마는 한동안 자기의 생일이 다가오면 외할머니가 해주던 미역국이 그립다며 울고, 외할머니가 소천한 계절이 되면 날씨 탓을 하며 울었다. 엄마는 꼭 나무뿌리가 뽑힌 것 같다고 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우리 삼 남매는 초등학생 때까지 겨울 방학만 되면 한 달씩 제주 외할머니 댁에서 지냈다. 그 시기 외할머니는 제주시에서 만화 가게를 하셨는데, 그 드넓은 만화방의 소파를 토끼 뛰듯 깡충거리다가 소파에 널브러져 있을 때면 ‘아, 이곳이 진짜 천국이구나.’ 싶었다. 외할머니는 그런 난봉쟁이 손주들이 뭐가 예쁜지 매일 우리 손에 동전을 조금씩 쥐어 주었다. 그럼 우리는 외할머니를 돕겠다며 만화 가게의 마감 시간마다 열심히 대걸레질을 했다.  


 내가 기억하는 외할머니는 신심 깊은 불교 신자였다. 외할머니는 베란다에 모셔놓은 불상에 과일을 가지런히 깎아 놓고, 정성스레 염불을 외었다. 엄마는 외할머니가 장난기가 많은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내 기억 속 외할머니는 늘 조심스러운 태도와 인자한 미소를 지닌 부처님 같은 모습이다. 나는 외할머니의 큰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고요하지만 따뜻한 목소리로, 용건에 맞는 말만 하셨다. 이를테면 “둬라. 애들은 그러면서 크는 거다.” 같은 것 말이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해도 늘 내 편에 서 주셨던 외할머니라 ‘역시, 내 가장 든든한 백은 엄마가 아니라 외할머니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간절히 바라는 일이 있거나 큰 보름달이 뜬 날이면, 항상 하늘에 계신 외할머니에게 소원을 빈다. 둥그렇고 충만한 달은 외할머니하고 꼭 닮았다. 외할머니 같은 달님에게 소원을 빌고 나면 왠지 그 소원은 곧 이루어질 것만 같다. 외할머니가 하늘에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내 소원을 이루어 주고, 나를 지켜줄 것만 같기 때문이다. 오늘 밤에도 보름달이 뜬다고 하는데 오늘은 달님에게 나의 안위를 바라지 말고, 오랜만에 외할머니의 안부를 물어야겠다. 외할머니의 생일이자 기일인 오늘, 내가 외할머니가 그리운 만큼 외할머니도 우리가 많이 그리우실 테니 더 많은 이야기를 조잘거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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