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 소설
“Can I have one bagle with an Ice latte?”
민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영어로 자연스럽게 커피와 베이글을 주문하곤, 열 평 남짓한 카페의 귀퉁이 소파에 자리 잡았다. 매주 주말엔 일을 위해 꼭 와야 하는, 이 도시에서 가장 일찍 여는 카페이다. 아직도 날이 어둡다. 해가 중천에 뜨려면 6시간은 남았다. 우기 특유의 습습한 공기를 뚫고 백팩 가득하게 자습서와 수업 자료, 그리고 두 손에는 노트북 파우치와 지갑, 핸드폰을 챙겨 나왔다. 9시 첫 수업까지 2시간 30분이 남았다. 아니, 수업 10분 전에 도착해야 하고, 이동 시간까지 계산해보면 정확히 2시간 10분이 남았다. 130분 동안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어젯밤 미리 어휘 자료를 정리해 놓은 것에 부지런히 안도감을 느꼈다. 민혜는 길게 호흡을 가다듬을 때면 틈틈이 시계를 확인했다.
일에 열중하고 있는데 동네 꼬마가 엄마와 함께 카페에 들어왔다. 민혜는 Jack과 그의 엄마에게 짧은 눈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이들의 등장으로 대강 7시 30분이 되었을 거라고 짐작한다. 그렇다면 출발 전까지 70분이 남았다. 서둘러 체크리스트 하나를 지우고, 다른 일을 시작하며 시계를 봤다. 경제 활동을 시작한 뒤부터 시계가 필수품이 된 지 오래다. 민혜는 종종 자신이 시계의 초침과 시침으로 태어난 건 아닐까 생각했다. 일할 땐, 한 시도 쉬지 않는 ‘초침’에 가깝고, 잠잘 땐 천천히 움직이는 ‘시침’인 것도 같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이 동그란 시계 속 시간을, 민혜는 직접 시곗바늘이 되어 ‘피자’ 자르듯 시간을 쪼갰다. ‘시간은 피자요, 인간은 시침과 초침으로 구성된 피자 커팅기일수도 있겠다’ 싶어 피식 웃음이 났다. 고작 피자 커팅기가 되어 세모난 피자 조각처럼 잘리는 삶을 살기 위해 그렇게 경쟁하고, 상처 받고, 절망하다가 타국으로 넘어왔나.
처음 이 나라에 왔을 땐, 4월의 극더위에 지쳐 머리가 핑글 돌아 쓰러질 뻔했던 적도 많았다. 그래도 이곳에서 두 해를 보내고 나니, ‘그늘’로만 혹은 ‘지하도’로만 이동하는 ‘두더지’의 경로를 꽤나 속속들이 알아냈다. 서울에서 지냈다면 어땠을까. 여전히 중소기업에서 200만원 안팎의 월급을 받으며 매일 사직서를 수납장에 집어삼켜 놓으며 지냈을까. 취업난이 극심하니 눈을 낮춰 비어 있는 자리 어디든 들어가라고, 문과 여자 사무직 다 똑같다는 주변의 목소리가 귀에 쨍쨍 울렸다. 공무원 시험에 붙으면 부잣집에 시집갈 수 있다는 말은 덤으로 딸려온다. 동네 친구들은 여전히 안산에서 강남으로, 부모님 집에 살며 출퇴근을 하는 20대 ‘캥거루’족이다. 장거리 출퇴근을 하다 보면, 데이트할 힘도 시간도 없어 결혼은커녕 연애도 힘들다고 한다. 타국 생활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적어도 여긴 캥거루족에서만큼은 탈출할 수 있다.
민혜는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금방 130분이 지났다. 가방 가득 수업 자료를 넣지만, 1교시 수업 자료는 차마 다 넣지도 못 하고, 노트북 파우치와 함께 손에 들고 문을 나선다. 카페 문을 등으로 밀고 나오니, 후드득 두꺼운 빗방울이 떨어진다. 민혜는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이 나라의 ‘스콜’이 짜증스럽지만, 한국의 장맛비보다야 낫다고 생각한다. 우산을 펼칠 손이 없지만 괜찮다. 여느 때와 같이 ‘두더지’의 경로를 이용하면 된다. 그녀는 짧아진 두 개의 팔, 그러니까 총 네 개의 다리로 분주히 움직였다. 온몸을 덮은 고동색 털이 조금씩 비에 젖었다. 민혜는 길어진 주둥이로 호흡을 내쉴 때마다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했다.
*엽편 소설: 원고지 4-20매 분량의 짧은 소설, 꽁트를 가리키는 말. 나뭇잎처럼 작은 지면에 인생의 번쩍하는 한순간을 포착해 적는 문학 양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