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수시에 떨어지면 학교에 찾아가 시위하겠다고 호기를 부리던 아이가 불합격 결과를 받아든 날, 문제가 틀렸다며 울었다. 내 앞에서 고전 산문 5문제를 풀고는 푼 문제가 오답이 났다며 다섯 살 꼬마처럼 울어 버렸다. 스트레스성 위염으로 복통을 달고 사는 아이는 수업을 할 때마다 배를 움켜쥐고 공부를 한다. 현관문을 여는 아이는 항상 구부정한 자세와 창백한 얼굴이다. 이제 나흘 남은 시험을 앞두고, 아이들은 긴장을 푸는 약을 마시고 혹시 모를 포털 사이트의 ‘수험생을 응원합니다’ 글귀를 피해 핸드폰을 꺼놓고 책에 몰두한다.
어제 한 명, 오늘 두 명의 고3 수업을 마무리했고, 다음 주 수요일까지 또 여섯 명의 학생들과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다. 사실 사교육 강사는 수험생 아이들과 작별 인사를 나눌 시간이 없다. 수능 시험 전 마지막 수업에서 EBS 연계 교재 주요 작품을 복습하고, 수능 시험 유의사항을 안내하며, 약소한 응원 선물을 주고 여느 때처럼 수업을 마친다. 사교육 강사와 학생들의 관계는 수능 시험이라는 절정에서 결말 없이 뚝 끊기는 셈이다.
최근 며칠은 아이들 요약 정리해준다고 주요 작품을 90분 동안 랩퍼마냥 읊어주는 걸 반복했더니 속이 울렁거렸다. 가슴도 답답하고 속도 쓰렸다. 사실 몸이 안 좋은 건 괜찮은데, 혹여 아이가 한 명이라도 우는 날에는 마음도 안 좋다. 참 어렵다. 나는 슬플 상황도, 초조한 상황도 아니지만, 아이들의 글썽이는 눈과 떨리는 눈동자를 보면 어느새 내 몸에도 눈물과 초조함이 쌓이는 것 같다. 수능 막바지 시기, 집에 오면 신체에 쌓인 아이들의 슬픔이 터져 나와 울어버리는 날들도 있었다.
3주 전부터 약속한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오랜만에 햇살이 잘 드는 곳에 가서 커피도 마시고, 맛있는 브런치도 먹기로 했었는데, 하루 전이 되니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았다. 속이 쓰린 상황에 커피와 브런치를 배 속에 넣을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을지로까지 나갔다 오면 수업 준비 시간이 부족할 테고, 주 6일을 끊임없이 주절거렸는데 또 수다를 떨 생각을 하니 머리에서 땀이 나는 것 같았다. 급하게 전날 늦은 밤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다. 상황이 여차여차해서 아무래도 내일은 못 나갈 것 같다고. 너무 미안해서 지금 내 상황을 최대한 구구절절 설명했다. 몸도 안 좋고, 집은 지저분하고, 말을 그만하고 싶고, 어제도 힘들어서 울었다고.
이게 아무래도 감정을 토해내듯 들렸나 보다. 친구는 ‘보배야. 수능보다 너가 더 소중해.’라는 메시지를 보내더니 곧 전화를 해왔다. 친구의 메시지를 보고 나도 모르게 또 눈물이 났다. 친구가 내 목소리를 듣더니 계속 나를 달랬다. “고생했어. 너가 그렇게 최선을 다한 걸 내가 알아. 걱정돼서 전화했어. 너가 한 노력 아이들도 다 알 거야. 내일은 맘 편하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쉬어. 너는 수능보다 소중해.”
갑자기 머리가 뭐에 맞은 것처럼 멍했다. 나는 왜 저렇게 말하지 못했을까. 당사자인 아이들은 나처럼 울 시간도, 위로 받을 시간도 없는데. 마지막 인사를 할 때, 잘하고 오라는 말 대신에 수고했다고 말해줄걸. 너가 한 그동안의 노력, 내가 다 봐왔다고, 고생 많았다고 해줄걸. 마지막에 문제가 틀렸다고 우는 아이에게 ‘넌 잘할 수 있어’라는 말보다 ‘너는 시험 문제보다 소중해. 최선을 다한 걸 알아.’라고 해줄걸. 수능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줄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