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지 건
마사지 건 엄청 좋다. 얼마 전에 글쓰기 모임원 한 분이 마사지 건이 엄청 좋다는 글을 올리셔서 보다가 남편이 전날 밤 마사지 건을 하나 더 사자고 조르던 일이 떠올랐다. 남편은 기계를 좋아해서 온갖 기계를 사들이는 취미가 있는데, 요즘엔 마사지 건에 꽂힌 모양이었다. 하지만 집에는 이미 마사지 건이 하나 있고, 목에 두르는 안마 기계 같은 것도 있다. 종종 거대 안마의자인 세라젬이 엄청나다는 칭찬도 곁들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요가원 등록해줄 테니까 가서 운동으로 풀라고 했다. 근데 마침 페이스북에 마사지 건과 세라젬에 대한 칭찬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오늘 우리는 국내 남쪽 지방으로의 닷새 여행을 마치고 부산에서 막 돌아왔다. 평소에도 남편이 운전하기는 하지만, 오늘도 내내 남편이 운전을 했다. 요즘엔 내가 운전에 자신감이 붙기도 해서 내가 하겠다고 했지만 남편은 내게 맡기지 않았다. 아마 내가 전날 자동차 사고가 나는 악몽을 꾸고, 눈 뜨자마자 악몽 타령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김해에 가던 길에 전국 최다 추돌 구간이란 이름이 붙은 터널을 지나다가 앞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았고, 우리 차도 급브레이크를 밟았는데, 우리 뒤에 뒤에 차가 우리 뒤차를 박았다. 아슬아슬했던 순간이었다.
그 후로 앞차와 가까워질 때마다 남편 어깨를 두드리며 앞차하고 멀리 떨어져 달라고 부탁하는 나를 보며 남편은 내게 운전을 맡길 수 없었을 것이다. 부산에서 집까지 대략 6시간 조금 넘게 걸렸다. 중간에 경주에 들러 황금십원빵도 사먹고, 청주에 들러서 보리밥도 먹고 온 시간을 제외하면 5시간은 꼬박 운전했을 텐데 남편은 불평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남편은 청주에서 서울로 탱고 추러 오는 분 이야기를 하며 매번 이 길을 다닌다니 대단하다는 말을 연신 반복했다. 그런저런 이야기에 나는 맞장구를 치며, 같이 정지우 작가의 <글쓰기 북토크>를 들으며 심심하지 않게 집에 왔다. 집에 도착하니 거의 9시가 다 되어갔다.
글쓰기 북토크도 끝이 나고, 남편이 씻는 동안 나도 얼른 짐 정리를 했다. 종일 운전했을 남편 피로를 풀어주고 싶은데, 사실 남편은 몸이 꽤나 두툼한 편이어서 주무르다 보면 5분을 채 못 하고 포기하고 만다. ‘어쩌지…’ 싶다가 갑자기 마사지 건이 생각났다. 며칠 전 사네마네 했던 그 마사지 건이었다. 남편을 바닥에 눕혔다. 남편은 가장 강력한 걸 원한다고 해서 부리를 가장 뾰족한 버전으로 끼웠다. 그리고 진동도 최대로 높이고 목 뒤부터 시작했다. 이게 처음에는 좀 귀찮게 느껴지는데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마사지 건이 닿지 않은 부분을 색칠 공부하듯 꼼꼼하게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목 뒤부터 팔, 허리, 다리, 발바닥까지 열심히 하게 된다.
10분 정도 됐을까. 남편은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고, 나도 뿌듯하게 마무리를 했다. 하다 보니 나도 받고 싶어졌다. 얼른 씻고 와 누웠더니 남편이 “와이프는 제일 연약한 부리로 하자.” 하면서 마사지 건 전원을 켜 마사지를 시작했다. 이게 별거 아닐 줄 알았는데 두툼한 손으로 옷이 올라가지 않게 꼭 잡고 살살해주는데 왕비님이 된 것 같았다. 온몸이 금세 노곤 노곤해졌다. 방바닥은 따뜻하고 마사지 건은 시원했다. 남편은 내 몸에 마사지 건을 두 차례 돌렸다.
따뜻한 집에서 남편하고 서로에게 마사지 건을 해준 밤이 이번 여행 5일 동안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여행도 좋았지만, 역시 편안함만큼 좋은 건 드물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언젠가는 나와 남편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서로의 등을 긁어주면서 지내고 있지 않을까 싶다. 효자손으로 자기 등을 긁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짝꿍 손에 내 등을 맡기는 것도 꽤 괜찮은 것 같다. 결혼도 안 하고, 평생 해외를 돌아다니면서 자유롭게 살 거라고 호언장담하던 내가 언제 이렇게 변했는지 참 모를 일이다.
전에는 결혼이나 아이를 낳는 것이 그저 ‘나이가 되어서, 남들 다 하니까, 초등학교 다음에 중학교 가듯이’ 미션처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치만 요즘에는 꼭 그런 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혼자 해도 되는 마사지 건을 서로한테 해주면 편안함이 더해지는 것처럼 어떤 순간에는 누군가와 함께인 것이 내게는 안락함을 증폭시킬 때도 있는 것 같다. 물론 항상 좋을 때만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냥 지금까지 살면서 느껴본 적 없는 이런저런 감정을 처음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지 않나 싶다. 세상의 모든 감정을 느껴보고 싶다던 사춘기 시절 위험한 목표를 뜻밖의 영역에서 조금씩 이루고 있는 듯하다. 그게 뭐든 처음 해보기 시작할 땐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들이 있고, 그게 참 작고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