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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배 Oct 05. 2021

피곤한 날

일상

매년 가을 무렵이 되면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남들은 단풍 구경을 가고, 산에 올라 밤을 주우며 가족들과 느긋한 연휴를 보내는데, 나는 그저 시간을 어떻게든 잘게 쪼개 가장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을지만 고민한다. 며칠 전 남편이 내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무언갈 설명했는데, 나도 모르게 문득 ‘이건 도입 부분이니 빠르게 지나가고, 본론만 첫째 둘째 셋째로 요약된 걸 확인하면 좋겠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1.5배속의 속도로 전달되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다가 아차 싶었다. 이제는 남편의 말소리까지 시험지로 보이는구나.


수능이 다가올수록 아이들의 긴장감은 내게도 전가되고, 그들의 초조함과 긴장은 나를 더 채찍질한다. 더 열심히 일해야만 한다는 생각뿐이다. 내가 이렇게 같이 긴장하고 초조해하는 것이 결코 아이들의 성적 향상을 만드는 게 아니란 걸 알지만, 벌써 수년째 이 마음이 마음처럼 잠잠해지지 않는다. 이럴 땐 이런 마음을 차분하게 어르고 달랠 ‘비장의 소스’가 필요하다. 감정 정화에 효과적인 라면에 불닭 소스라든지, 간장 계란밥의 향기로운 참기름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요즘 나의 비장의 소스는 무어냐면, 바로 핸드 드립 커피를 내리는 ‘3분’이다. 잠들기 전까지 일하고, 눈 뜨자마자 일하는 상황에서 여유롭게 산책을 나가거나 요가를 하는 시간은 사치이다. 늘 그런 시간만큼은 남겨놓자 하지만, 왜인지 나는 그게 좀처럼 잘 되지 않는다. 프리랜서로 살다 보니 시간이 경제 가치로 바뀌는 모습을 바로바로 눈으로 본다. 돈이 최고는 아니지만, 꼭 필요한 친구란 걸 부정하긴 어렵다. 그래서 이 시기를 어떻게 하면 잘 버틸지를 고민해야 한다. 뜻밖에 발견한 방법이 핸드드립 커피 한 봉이다.


얼마 전 지인에게 핸드드립 커피 원두 한 박스를 선물 받았는데, 상자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에티오피아 원두에서부터 묵직한 과테말라까지 골고루 들어 있었다. 날도 선선해졌겠다 오랜만에 티 포트를 꺼냈다. 95도로 온도를 맞추어 물을 끓였다. 기다리는 동안, 전날 사놓은 말랑한 우유 식빵을 토스트기에 넣었다. 그리곤 드립백을 꺼냈다. 마개 부분을 뜯자 커피 향이 코 끝에 묻은 것처럼 진하게 났다. 티 포트의 물이 온도에 맞춰 끓자 소량의 물을 조금씩 3~4번에 나누어 부었다. 물이 조르륵 떨어지는 소리에 귀가 깨어나고, 물에서 피어나는 커피 향에 코가 깨어나는 것 같았다. 바삭하게 구운 식빵과 한 입 먹으면 눈과 입까지 완벽하게 깨어날 것이다.


지친 일상에 과격한 알람 소리가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물이 떨어지는 소리, 은은한 커피 향, 거기에 활짝 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깥공기가 나의 하루를 부드럽게 깨운다. 매분매초를 조급하게 계획하고, 움직이는 나에게 이 짜여진 느긋한 시간인 ‘3분’은 어제의 지친 나를 넣어 두고, ‘새로운 나’를 꺼내는 데에 한몫 톡톡히 한다. 문득 사람에게 감각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생각해보면 내가 행복했다고 느꼈던 순간들은, 아침 일찍 간 카페 테라스에 햇살이 비치고 새소리가 들리는 순간이나 살에 닿는 바람결로 봄, 가을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던 것 같다.  


인생을 살면서 스스로를 잘 정돈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는 건 참 마음 든든한 일인 것 같다. 생활이 지치고 고단할수록 어쩌면 이런 방법들을 더 넉넉하게 찾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힘든 날에는 조금 더 햇살과 바람결을 느끼고, 잠깐이라도 편안한 노래를 자신에게 들려주는 일. 어쩌면 짧은 글을 적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일 수 있겠다. 내년에는 감각을 조금 더 만족시키고, 틈새 시간으로 생활을 조금 더 즐길 수 있는 방법들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치고, 고단할 때, 나를 부드럽게 만져주고 일으켜 세워줄 수 있는 어떤 귀한 방법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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