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는 있는데 결말은 없..
집에만 있으니 지루하다. 친구를 만나야겠다. 마침 나처럼 심심해 보이는 온라인 친구 G가 있었다. 갑자기 무슨 용기에서인지 연락을 해봤다. 종종 zoom 독서 모임이나 북토크 등을 통해서 연결된 사이였다. 사실 G 역시 <세상에 모든 문화>의 필진 중 한 명으로, 편집자의 고군분투기를 올리고 있었다. 나는 매달 18일에 탱고 분투기를, G는 매달 6일에 편집자의 고군분투기를 올린다. 어째서 세상은 고군분투하지 않으면 안되는지 어쩐지 묘한 반항심이 생긴다. 아무튼 우리는 일요일 오후에 만나기로 했다.
G와 나는 길 건너에는 탱고 스튜디오가 보이며, 매장에서는 책을 파는 홍대입구역 카페에서 만났다. 온라인으로는 익숙하지만, 오프라인에서는 아직 낯선 이와 만나자니 소개팅하는 기분도 들었다. 인사를 하고 앉아서 마치 두어 번은 만나본 사이인 것처럼 최근에 읽은 책, 편집자의 생활, 탱고 동호회, 탱고를 추는 장소인 밀롱가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수다로 두어 시간쯤 지나고, 우리는 만나기 전에 말했던 대로 밀롱가로 향했다. 얼굴이 조그맣고 손발이 찰 것 같은 언니는 밀롱가 입구에 한참을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밀롱가를 구경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주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치마와 날렵한 하이힐을 신고 추는 사람들, 어쩐지 그날따라 빠른 음악이 많이 나와서인지 대체로 편안하고 행복한 분위기였다. 대개 서정적이면서 비애감이 느껴지던 다른 날들의 분위기와는 조금 달랐는데 G는 이 편안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G는 조그만 목소리로 “너무 좋은데요…”라고 했다. 예전에 흥미롭게 봤던 영화 <탱고 레슨>을 아무래도 다시 봐야겠다고도 했다. 밀롱가를 떠날 때에는 탱고를 배울 수 있는 동호회 링크를 보내 달라고 했다. 의미심장해 보이는 그의 표정이 비장했다. 밀롱가에서는 남미식 인사법인 ‘베쏘(beso)’로 인사를 하는데, 그날 밀롱가를 떠나는 G에게 나도 모르게 베쏘로 인사했다. 가볍게 포옹을 한 채 뺨을 대고 작별 인사를 하니 왠지 정말 G가 탱고를 배울 것 같았다.
집에 돌아가면 G가 인상 깊게 봤다는 영화 <탱고 레슨>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탱고를 추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영화인데,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주말 저녁에 탱고를 추고 들어가, 다시 또 익숙한 탱고 음악이 나오는 영화를 봐야겠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배우 ‘샐리 포터’의 탱고를 보고 싶다.
영화 <탱고 레슨>의 감독이자 주인공인 ‘샐리 포터’는 <Rage>라는 새로운 영화 대본을 쓰다가 머리가 복잡해졌나 보다. 대본이 잘 풀리지 않는지 거리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파블로 베론’의 탱고 공연을 본다. 포마드로 머리를 가지런히 넘긴 채 파트너와 숨 가쁘게 춤을 추는 파블로의 모습에 샐리는 금세 매료된다. 그리곤 공연이 끝난 뒤 무대에서 나온 파블로에게 탱고 레슨을 문의한다.
그렇게 첫 번째 레슨이 시작되고, 수업 장소까지 찾아온 샐리를 아르헨티나 특유의 나른함으로 맞이하는 파블로. 둘은 음악도 없이 먼저 ‘걷기’부터 시작한다. 수업을 세 번쯤 들었을 때, 샐리는 집 수리를 핑계로 땅고의 고장,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떠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샐리는 평범해 보이는 두 명의 선생님에게 수업을 듣기도 하는데, 그 선생님들은 세계적인 누에보 댄서 Gustavo Naveira(이하 구스타보)와 Fabian Salas이다.
구스타보는 이제 막 탱고를 시작한 샐리에게 고개를 정면으로 들기, 두 발은 항상 리더를 향하기, 한쪽 다리로 중심 잡기 등을 알려준다. 처음으로 탱고 슈즈를 맞춘 샐리는 어색하게 걷기도 하면서 점점 탱고에 빠져드는데, 이 일련의 모습들이 선생님이 구스타보인 것만 뺀다면(…) 내가 처음 탱고를 시작했을 때의 모습과 비슷해서 계속 웃음이 났다.
초보 땅게라 역할을 연기하는 샐리의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샐리의 춤은 가벼우면서 탄성 있고, 부드러우면서도 안정적이었다. 샐리 포터는 실제로 꽤 오래 탱고를 춘 땅게라임이 분명하다. 중간중간 카메오로 등장하는 유명 댄서들 역시 영화의 재미를 살린다. 밀롱가에서 샐리에게 춤 신청을 하고, 이에 파블로가 처음으로 눈에 불을 켜고 질투를 하는 대상은 탱고계의 전설인 Carlos Copello이다. 이 영화를 탱고를 추지 않는 사람들이 봐도 아름답다고 입을 모으는 이유는 아무래도 이런 전설적인 댄서들의 탱고 덕분이 아닐까 싶다. 그들의 탱고에는 그들의 인생이 담겨 있고, 그 에너지를 느끼기에는 단 몇 초면 충분하니 말이다.
영화에서는 마치 인생이 그렇듯 사랑, 성장, 분노, 질투와 같은 다양한 감정선과 그 안에서의 모순적인 행동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사랑하지만 일부러 거리를 두고, 함께 추는 춤인데, 한쪽은 그저 follow만 하라는 파블로의 말처럼 모순투성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실제 이름은 모두 극중 이름으로 그대로 사용되며 직업도 같다. 그래서인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허구인지 도통 구분이 어렵다. 샐리가 극 중에서 내내 고통받으며 쓰는 영화 대본 <Rage>는 실제로 12년 뒤인 2009년에 개봉하기도 했다. 마치 탱고에서 자주 사용하는 동작인 ‘오초(숫자 8)’의 형태 혹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현실과 허구가 혼란스럽게 뒤섞인다.
탱고를 배울 때에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긴장을 풀고 추되 축은 단단히 잡고 있어야 하고, 머리는 하늘로 우뚝 솟아야 하지만, 골반과 엉덩이는 바닥에 푹 내려놓아야 하는 것처럼 인생도, 영화도, 탱고도 모든 게 역설이고 모순이다. 주인공이자 감독 샐리 포터가 말하고 싶었던 건 무엇일까. 땅고를 통해 인생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 인생을 땅고에 함축하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어쩌면 그녀의 ‘땅고 판타지’를 직접 영화 속에 구현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편집자 G가 하루빨리 탱고를 배워서 같이 밀롱가에 놀러 가고, 와인을 마시면서 음악을 듣고, 샐리 포터처럼 풀리지 않는 글의 늪에서 한 템포 쉬어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곁에는 언제나 각자의 취향에 맞는 음악에 몸을 맡기고 자유를 만끽할 자유가 있다. 붉은 와인에 취해 나만의 스텝을 밟는 일은, 어쩌면 매일 아침 출근하는 일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