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입덧 일기(7주 1일차 2023.4.16)
평양냉면을 먹다가 울어버렸다. 자정 다 돼서 평양냉면이 먹고 싶다고 해서 남편이 마침 오늘 배송 받은 봉피양 평양냉면을 끓여줬는데, 찬물에 헹구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남편은 부엌에서 완성된 냉면을 보면서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면을 찬물로 헹궜어야 했는데…”하고 말이다. 침대에 누워 있다가 나온 나는 냉면을 찬물에 헹구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했다. 어떻게 냉.면.을 찬물에 안 헹구냐고 마치 주방장이나 된 듯이 젓가락으로 면 하나를 꺼내서 온도를 재보곤 안 먹겠다고 선언했다. 남편은 강아지 같은 표정이 되어서는 일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침실로 들어가서 누웠다. 종일 밥을 깨작거리면서 먹었더니 속이 쓰렸다. 생전 안 나던 꼬르륵 소리도 크게 들렸다. 지금이라도 안 먹으면 내일 아침에 고생할 게 뻔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결국 다시 나가 남편이 끓인 미지근한 평양냉면을 들고 남편 있는 방에서 먹기 시작했다. 남편은 갑자기 다정하게 맛있냐고 물었다. 나는 이 냉면이 아무 맛도 안 나서 먹을 수 있는 거라고 했다. 아무 맛이 안 나야 먹을 수 있는데 그나마 차가워야 개운하게 먹는데 그마저도 안 느껴진다고 한스러운 여자처럼 굴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맹맛인 평양냉면을 입에 물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어쩐지 앞으로 흑역사가 될 예정인 오늘 자정.
임신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나도 모르던 내 모습들을 발견하고 있다. 내가 생각보다 익힌 감자와 당근을 잘 먹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과, 찜닭을 먹으면서 닭고기는 안 먹는 모순적인 여성인 것, 밤에라도 배고프면 달걀을 삶아먹는 음식에 열정적인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남편은 평소 굉장히 다정한 편인데, 그런 남편을 두고도 냉면을 찬물에 헹구지 않았다고 까다롭게 굴다가 결국 미지근한 냉면 씹으면서 눈물 흘리는 여자이기도 했다. 맹맹한 봉피양 냉면은 맛이 꽤 괜찮았다.
면을 한 열 가락 정도 먹으니까 배가 불렀고, 금세 기분도 풀렸다. 남편한테 기분이 좀 괜찮아졌다고 알렸다. 남편은 가만 있다가 그럼 수박을 가져다 주냐고 물었다. 나는 한라봉이라고 대답했다. 안타깝게도 남편은 ‘응’이라고 대답하고 곧장 가는 걸 까먹었다. 또 거의 울먹거릴 뻔했는데 남편이 얼른 가서 가져왔다. 사실 한라봉은 내가 가져와도 됐는데 내 눈물의 포인트는 ’까먹을 거면 묻지나 말지‘였다. “그럴 거면 기대하지 말게 묻지나 마..ㄹ..(촉촉)” 하는데 남편이 한라봉을 가져왔다. 얼마 전에 한라봉을 선물 받았는데 너무 달고 맛있어서 금방 한 상자를 다 먹고 또 한 상자 주문했다.
입덧을 시작하고 나서 우리집은 과일 가게가 된 것처럼 과일이 많다. 제주에서 날라온 한라봉, 올해 첫 봄 수박, 태국 제철 망고, 입덧 완화에 좋다는 바나나랑 토마토, 냉장고에 항상 있는 사과와 배까지. 과연 둘이 다 먹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많다. 그래도 요즘 같은 속도라면 밥보다 과일을 많이 먹기 때문에 일주일치 반찬 사놓은 것처럼 든든하다. 우리 엄마는 오빠 때도, 쌍둥이를 가졌을 때도 입덧이 없었다는데 나는 왜 벌써부터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뱃속에 아기가 멀쩡하게 지내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안심도 된다. 사실 입덧이 없던 지난 며칠은 마음이 꽤 초조했다.
생각해보면 비록 평양냉면 먹으면서 울기도 하고, 새벽에 달걀 삶아 먹으면서 괴로워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쩐지 아기가 무사한 것 같으니 다 괜찮다. 하루하루 치솟는 생전 겪어보지 못한 호르몬 변화 때문에 여드름도 나고 머리도 지끈거리지만, 월요일에 병원 가서 건강하게 심장 소리도 듣고 가족들에게도 정식으로 알릴 수 있으면 좋겠다. 기다렸던 새 식구가 열심히 심장도 만들고 눈도 만들고 하느라 그런 거려니 하고 마음을 다잡는다. 아직 5g도 안 될 아기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