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 가능한 탱고
몸이 좋진 않았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언제든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어차피 개인 레슨이고 마스크 끼고 계속 환기하고 있으니 갔다 오자. 주섬주섬 챙기고 탱고 학원으로 출발했다. 선생님은 평소보다 내가 컨디션이 좋지 않은걸 눈치채시고는 평소보다 패턴 수업은 적게 하고 영상으로 이런저런 걸 보여주셨다.
-저거 봐, 발은 이렇게 하는 거야. 무릎을 여기서 펴잖아. 힐은 이렇게 바닥에 붙여서 추는 거야.
-이 동작 저번에 했지? 이거 기억나지? 선생님이 이렇게 한 거 본적 있지요?
라며 수업을 하다가 선생님의 경험담을 얹어주셨다.
- 이 사람이랑 이 사람한테 선생님이 배웠어요. 이 분들이 정말 대가야
그래서 춤 좀 출 줄 아는 사람들끼리는 이 분한테 사사 받았다고 하면 다 놀래.
-이 사람이 이 사람의 스승인데 마약까지 가르쳐놨어요. 그래서 이 사람이 일찍 죽었는데 이 사람 장례식장에 갔었거든. 얼굴도 만져봤어요. 약을 많이 해서 얼굴이 까맣더라
- 이 사람들이 탱고 처음 춘 사람들인데 이제 많이 죽었지.
요약을 하자면 선생님은 살롱 탱고 - 비자 우르끼자(Villa Urquiza) 스타일 전공자란다. 비자 우르끼자는 아르헨티나의 한 동네 이름이다. 이 동네에서 탱고를 잘 추는 사람들이 많았어서 이 지역에서 개발된 춤 스타일을 비자 우르끼자 스타일이라고 부르며 아르헨티나 탱고 중 가장 춤사위가 이쁘고, 살롱 탱고의 근간이라고 한다. 선생님의 말을 빌리자면 단순하고 우아하게 추는 걸 컨셉으로 하는 게 비자 우르 끼자 스타일이라고 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기다 아니다 말이 좀 있긴 했지만 어쨌든 나 역시 탱고 학원을 찾을 때 모든 선생님들의 동영상을 찾아봤는데 지금 배우는 선생님의 영상을 보고 어 뭔가 좀 더 요란하지 않고 점잖고 우아하다고 느껴서 선생님을 결정하는데 큰 요인이 되긴 했었다. 아 그게 비자 우르 끼자 스타일이라 그렇게 느꼈구나 싶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이 자기가 젊었을 때 춘 영상을 보여주고
-나도 이제 나이가 많이 먹었네. 언제까지 출 수 있을까. 그러니 선생님한테 엑기스 잘 배워놔요.
라고 한 다음 회한이 가득한 미소를 지었는데 마음이 좋지 않았다.
사실 나도 안다. 한국에서는 예체능계가 그렇듯 지금 배우는 선생님의 탱고 스타일을 한국에서 직업으로 이어갈 사람이 잘 없다는 것을. 돈을 잘 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안정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춤이라는 게 결정적일 때 무시를 당하는 면이 있다. 꼭 몸을 사용해 춤을 추지 않더라도 이야기만으로도, 정서만으로도, 음악만으로도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는 게 탱고인데 사회적 가치가 그다지 높이 평가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러한 다양한 문화가 사회에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는 게 과연 공정한 일일까.
게다가 우리나라는 장인을 인정해 주는 문화가 약한 편이다. 기술이나 몸으로 한다는 걸 경시한다는 거다. 장인한테 배워 인정을 받고 제대로 하면서 이어나가려고 하는 게 가치가 분명히 있는 일인데 왜 이렇게 늘 어려울까. 내가 좋아하기 때문에 이어가고 싶은 거라면 할 말이 없지만 동시에 왜 내가 좋아하는지 알기에 절대로 놓을 수 없는 게 나에게는 탱고이다. 어떻게 하면 질 좋은 탱고가 계속 이어갈 수 있을까 분명히 가치가 있는데. 그리고 이게 과연 공정하고 정당한 일인가.
내가 느끼는 탱고의 가치는 바로 이거다. 기쁨이나 구애, 의식을 위한 춤은 많지만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둘이 함께 추는 춤은 많지 않다. 탱고는 고향을 떠난 외로움을 달래려고 탄생한 춤이다. 생각해보면 100년 남짓한 시간 동안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퍼져있는 문화가 많지 않다. 삶. 음악. 역사. 문학. 그리고 몸의 움직임. 이토록 많은 요소가 담겨 있는 문화가 어디 있을까.
탱고는 슬픔을 재료 삼아 열정을 만들어 낸 춤이다. 인생에 슬픔이 없는 자가 어디 있는가. 그 슬픔을 불태워 열정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한번쯤 해볼 만한 일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