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의 창수 씨
가을 하늘이 청명했던 며칠 전, 창수 씨와 창수 씨의 첫째 딸이자 나의 언니, 그리고 나는 여유로운 나들이를 떠났다. 나들이라야 창수 씨가 **병원에서 채혈하고 피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의 약 2시간을 병원 앞 정동길을 거닐고 맛있는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일이라지만, 여느 때 하지 않았던 아빠와의 데이트를 할 수 있는 시간이니 나들이가 맞지 싶다.
10시 30분경 채혈실에 도착했다. 대기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렸다. 창수 씨 차례다. 채혈실에서 창수 씨는 피를 뽑았다. 그 후 우리는 슬슬 병원에서 나왔다. 햇살이 좋았다. 시계를 보니 11시가 조금 넘었다. 피검사결과는 오후 1시 30분에 담당의와 미팅에서 알 수 있다고 했다. 우리에게는 2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언니는 아빠가 공복 채혈을 해야 해 아침 식사도 못 드셨으니 바로 식사를 하자했다. 병원 앞 식당에 갔다. 창수 씨와 나는 갈비탕을 시켰다. 김치와 깍두기가 나오고 조금 지나자 공깃밥과 갈비탕이 나왔다. 그릇 안에 갈비도 많고 국물도 진했다. 국물에 떠있는 파에서 파향이 진하게 나 미각을 자극했다. 창수 씨가 밥을 말았다. 나도 창수 씨를 따라 했다. 밥공기 가득 담긴 흰쌀밥을 갈비탕에 넣고 숟가락으로 저었다. 그리고 후후 불며 먹었다. 점점 뱃속이 따스해졌다. 배도 불러왔다. 자연스레 여유가 생긴다. 그 여유로움을 틈 타 창수 씨에게 "아빠, 점심은 내가 낼게."라고 배짱도 부려본다. "그런 말 하지 마. 아빠가 사지." 부자(?) 창수 씨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언니에게 건넨다. 쉰 살을 전후로 한 두 딸은 마치 다섯 살 딸 같이 아빠가 사준 밥을 잘도 먹었다.
햇살은 따사롭고, 공기는 신선하다. 평일 오전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 정동길은 여유롭다. 슬슬 거닐다 정동극장으로 들어가 1층 카페에서 커피를 사서 뜰로 나온다. 나무 아래에서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가을을 온몸으로 느끼기에 충분하다. 커피를 마시며 옛날옛적 아빠의 옛날이야기를 듣기 시작한다. 처음 듣는 창수 씨의 인생 에피소드다.
"나는 광주에 있는 훈련소에서 신병훈련을 했어. 군대 간다고 검사를 하는데 무슨 시험을 보는 거야. 그런데 시험 문제가 블록 쌓기 문제도 많고 그러더라고.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게 IQ검사였나 봐. 블록 쌓기 문제가 몇 문제 있는데 너무 어려운 거야. 시골에서 일만 하고 농사만 지었는데 그런 걸 어떻게 알겠어. 근데 내 앞에서 시험 보는 애가 문제를 슥슥 잘도 풀더라고. 시험지가 기니까 앞에 앉은 애가 문제를 풀면 시험지가 점점 아래로 내려오더라고. 그거 보니까 블록 쌓기 문제도 다 풀어놓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커닝을 했지. 하하하. 걔는 좀 배운 아이였던 거 같아. 나중에 점수가 나왔는데 내 IQ가 140이 나왔어. 거기다 훈련소에서 군인이 암기해야 할 게 많은데, 신검받고서는 그걸 외워두었거든. 훈련소에서 다 외운 사람 손들어보라는데, 나를 포함해 단 두 명이 들었지. 그래서인지 나는 부대를 서울경기 쪽으로 배치받았어. 청와대에서 군대생활을 보내고 제대를 했지"
"하하하, 아빠 IQ 140이었던 거야?"
"뭐.... 140이겠냐... 커닝했는데..."
"아빠, 군 생활은 어땠어? 아빠 젊은 시절 통틀어 제일 좋았겠네.. 너무 가난해서 배고프고 했는데, 그런 건 없었을 거 아니야?"
"훈련소까지는 힘들고 배고프고 그랬는데, 서울로 배치받고 나니까 너무 좋은 거야. 밥걱정을 할 필요가 있길 해, 옷걱정할 필요가 있길 해... 너무 좋았지."
"난 군 복무를 청와대에서 했다"는 말은 아빠 인생에서 손꼽히는 자랑거리 중 하나였다. 그 시절 백(빽) 없이는 못 간다던 곳에 아빠가 부대배치를 받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운과 암기력이었던 듯싶다. IQ테스트에서 앞에 앉은 이로 인해 좋은 IQ점수를 얻을 수 있었던 통천지수(通天之數)의 운과 훈련소에서 암기해야 할 사항을 사전에 미리 준비한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
나는 창수 씨 인생에 많은 우여곡절이 있음에도, 여러 가지로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은 그가 운이 있는 사람이고, 그 운은 그가 준비해 온 무엇에 의해 끌어당겨졌으리라 생각한다. 커닝을 해서 IQ 140을 획득했다고는 하나 그의 삶을 반추해 보건대, 나는 그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겁(걱정) 많고 똑똑한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겁이 많아 늘 준비해야 했고 그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그래서 지금도 그렇고 그런 그의 삶에 쉼표 하나, 쉼표 둘, 쉼표 셋... 쉼표가 하나씩 하나씩 늘어나길 나는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