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르익지 않아도 멋스럽다

백수라서 할 수 있는 것들_평일 오전 삼청동 나들이

by 최선화

지난 수요일 삼청동에 갔다. 사전에 계획은 없었다. 그날 오전, 하늘이 너무 예뻐 집에만 있기는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혼자 가을 길을 거닐고 싶어 졌고, 골목길에서 우연히 발견한 작은 카페에서 진한 커피를 마시고 싶어졌다. 평일 오전 삼청동에서 가을을 만끽하는 호사를 백수인 지금 아니면 언제 누리랴. 무작정 나가 버스를 타고 인사동에 내렸다.


'예전엔 이 자리에 풍문여고가 있어 골목을 향하는 이에게 문지기 역할을 했었는데...'라며 오랜 기억과 함께 정독도서관으로 향하는 골목에 들어섰다. 덕성여중의 나무와 덕성여고의 나무가 서로 만나 나뭇잎 터널을 만들고 있었다. 한발 한발 나뭇잎 터널로 발을 옮겼다. 청량한 공기와 복잡하지 않은 길과 평일 오전의 여유로움에 감사하는 마음이 충만했다. 푸르던 나뭇잎은 조금씩 색이 변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아직 단풍이 졌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했다. 조금 더 찬 기운을 맞이하고 서리를 맞아야 노랗고 붉은색으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나면 골목길에도 부스럭부스럭 낙엽 밟는 소리도 들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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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통과해 국립현대미술관 쪽으로 방향을 옮겼다. 평일 오전의 골목은 여유로웠다. 풀과 나무는 노랗지도 빨갛지도 않았다.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았다. 시간이 더 필요한 그 모습 자체가 멋스러웠다. 아직 무르익지 않았지만 언젠가 붉어질 그날을 향하며 찬바람을 맞이할 나무는 의젓했다.

때문에 무르익지 않은 가을, 그 자체로 멋스러웠다.



'무르익는다'는 건 충분히 성숙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성숙되기까지의 시간과 노력이 담겨 있어, 모두 무르익음을 칭찬하고 우러러본다. 결과가 '무르익음'이라면 무르익지 않은 '어설픈 상태'는 과정이다. 이도저도 아닌 푸르지도 붉지도 않는 상태, 그 과정이 없다면 무르익음도 없을 것이기에, '어설픔' 또한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다. 살다 보면 과정의 소중함을 못 보고 지나칠 때가 있다. 매일 똑같은 일상에 지치고 힘겨울 때, 아직 가을이 무르익지 않은 어설픈 지금의 이 시기를 떠올려보아야겠다. 과정 속에 있기에 지금 내가 어느 과정을 지나치고 있는지 볼 수 없는 내 시간, 지금의 내 모습이 두려울 때,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바라보자. 과정, 그 자체로 멋스럽다는 것을 확인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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