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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수 씨는 평생 '안쓰러움'을 가슴에 담고 있었습니다

안녕, 나의 창수 씨

by 최선화

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타고난 착한 마음을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 한다. 일찍이 맹자는 '사단'(인의예지)이라 하여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는 네 가지 마음씨를 이야기했는데, 그중 인(仁)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측은지심이다.


'측은지심'하면 빼놓을 수 없는 분이 바로 창수 씨다. 창수 씨는 자식에 관한 한 '측은지심'의 끝판왕이다. 17년 전쯤이던가. 석사논문을 마치고 연구실에서 책을 빼야 해서 창수 씨에게 차를 가지고 학교로 와달라고 요청했었다. 정경대는 학교 맨 꼭대기에 있는 건물이었는데, 비탈이 어마어마했다. 창수 씨는 그날 정경대 건물 앞에 주차를 하고 책을 가지고 내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책을 트렁크에 싣고 창수 씨와 집으로 향했다. 창수 씨는 말했다.

"학교에 간다고 해서 그냥 가나보다 했더니, 저 높은 곳을 매일매일 오르내렸냐... 우리 딸이 저 높은 곳을... 오르내렸을 걸 생각하니.. 우리 딸이 얼마나 고생스러웠을까..."

창수 씨는 나를 안쓰러워했다. 마른 몸으로 무거운 책을 등에 메고 왔다 갔다 했을 내 모습을 눈에 그리며 마음 아파했다. 그때 나는 익숙해져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나의 일상을 왜 이렇게 측은해 하나 하고, 아빠가 너무 오버한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17년 전 일이 머리에 떠오른 건 작은 일에도 측은해하는 그의 마음씨가 무엇을 근원으로 하고 있는지를 드디어 알게 되어서다. 며칠 전 창수 씨에게 그의 아주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제야 나는 창수 씨가 왜 측은지심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창수 씨에게는 몇 살 많은 형이 있고, 몇 살 아래의 동생이 있다. 해방이 되고 남한 사회가 좌, 우로 정치적 혼란기에 있던 그 시절, 창수 씨 고향에서는 어떤 일로 인해 마을의 장정들이 모두 투옥된 일이 있었다고 했다. 창수 씨의 아버지도 그랬다고. 그리고 몇 년이 안 되어 아버지를 포함한 그때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시게 된다.

이런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창수 씨 어머니이자 나의 할머니는 아들 셋을 키우며 힘들게 살고 있었는데,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었는지 창수 씨의 형에게 "큰집에 아들이 없으니, 네가 양자로 가라. 큰집은 좀 여유로우니, 거기서는 먹는 게 좀 나을 거다."라고 말하고 형을 보냈다고.

큰 아들은 어쩔 수 없이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큰집에서 며칠을 보낸다. 그리고 며칠 후 엄마와 동생들이 그리웠는지, 집으로 찾아왔다고 했다. 당시 일곱 살의 형은 집에 와서는 "어머니, 저 굶어도 좋으니 여기서 같이 살랍니다. 큰집에 안 갈랍니다. 저 가기 싫어요."라고 울면서 매달렸다고.


창수 씨는 말을 이어갔다.

"형이 그 얘기를 하는데, 어머니가 집 앞에 있는 싸리비를 짚더니, 형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어. 그러면서 가라고. 네가 가야 다 살 수 있다고. 형은 울면서 가기 싫은 길을 떠났지. 나는 어두움 속으로 사라지는 형의 뒷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 형이 정말 안쓰러웠어. 가여웠어. 형이 가고 나서 나도 어머니에게 말했지. '어머니, 형과 우리 모두 같이 살면 안 되나요? 모두 같이 살고 싶어요.' 내가 그렇게 이야기했더니 어머니가 어린 나를 안은 채 한참을 흐느껴 우셨지... 그때가 내가 세네 살인 아주 어렸을 때인데도 그게 그렇게 선명하게 기억에 나"


'마음이 아프고 가엽다'는 의미를 가진 '안쓰럽다'는 말. 이 말은 '퍽 미안하고 딱하다'라는 뜻도 있다. 창수 씨가 어릴 적 경험한 마음이 아프고, 형이 가엽고, 형만 보내서 미안한 마음이 평생 그의 마음속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그랬다. 어릴 적 생각나는 첫 기억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고. 나는 아빠 등에 업혔던 기억 때문에 평생을 든든하고 따뜻하게 지냈는데, 창수 씨는 잊히지 않은 첫 기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안쓰러운 형의 뒷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창수 씨는 평생을 측은지심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던 것이 아닐까.


형의 뒷모습을 기억하는 창수 씨는 형이 지금도 안쓰럽다고 한다. 아버지 없이 큰 동생도, 나이가 일흔 중반인데도 안쓰럽다고 한다.

나는 창수 씨에게 말했다

"아빠, 큰아버지가 그렇게 안쓰러워요? 작은 아버지도 그렇게 안쓰럽고? 나는 평생 형과 동생을 안쓰러워하는 아빠가 더 안쓰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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