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루돌프 사슴코? 매우 반짝이는 빨간 창수 씨 코

안녕, 나의 창수 씨

by 최선화

겨울이 왔다. 추워 움츠려드는 계절이지만, 다들 왠지 모를 설렘과 희망을 가슴에 품는 시기이기도 하다. 크리스마스가 있고, 연말이 있고 새해 새날이 있어서일 것이다.


지금처럼 저작권이 체계화되지 않았던 시절, 이맘때쯤이면 거리에는 캐럴이 울려 퍼졌다. 거리에 크게 울려 퍼지는 캐럴과 믿을지 말지 각자가 선택하는 '산타와 루돌프의 만남'에 대한 일화는 겨울의 상징이었다.

루돌프는 매우 반짝이는 코를 가지고 있었고, 친구들에게는 놀림을 받았다. 하지만 그 반짝이는 코 덕분에 산타에게 뽑혀 선물을 가득 담은 썰매를 끌고 겨울 하늘을 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바로 믿을지 말지 하는 일화다.

루돌프 코가 왜 빨간지는 포털사이트에 검색만 해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데, 바로 모세혈관 때문이다. 순록은 먹이를 찾아 코로 눈을 헤집는데 이때 순록의 체온을 보호하기 위에서 코에 열이 집중된다는 게 지론이다. 순록의 코에 흐르는 모세혈관의 밀도가 사람보다 25%가 높아 붉게 보인다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나에게도 루돌프가 있었다. 매우 반짝이는 빨간 코를 가지고 있는 루돌프 창수 씨.

창수 씨는 추운 겨울에도 몸을 쓰며 밖에서 일을 하였다. 그의 직업은 자전거를 끌고(이후 오토바이로 바뀌었다) 소매점을 찾아다니며 접착제 제품을 파는 '찾아가는 도매상'이었다. 아이들이 크면서 교육비가 많이 들자 그는 직업을 바꿔 건설현장 철근일, 즉 막노동을 하였다. 날이 추우면 추운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곤혹스럽기 그지없는 일. 여름에는 등에 땀띠가 겨울에는 동상이 늘 함께했다. 추운 날 일을 하기 위해 얼굴을 최대한 가릴 수 있는 모자를 쓰기도 했는데, 눈과 코는 드러나야 해서 그의 코는 늘 시렸다.

당시에는 병원보다는 약국에서 약을 처방했던 시절이었다. 겨울이면 약국에서 동상 걸렸을 때 바르는 연고를 처방받았고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코에 그 연고를 바르는 것이 그의 저녁 일과 중 하나였다. 동상에 걸려본 이들은 알겠지만 차가운 곳에서 따뜻한 곳으로 들어오면 얼었던 부분에서 열이 나면서 빨갛게 되었다가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는다. 겨울이면 코가 얼고 녹고를 매일 반복하였고, 결국 창수 씨의 코는 빨간 코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그와 늘 함께한 나는 그의 코가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빨간색이었는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대학생 때 나의 절친이 얘기한 '친절하고 상냥한 너희 아빠의 트레이드마크는 빨간 코'라는 말을 듣고서야, '아~, 창수 씨가 빨간 코를 가지고 있었구나'라고 알아차리게 되었다. 아마도 그때 제대로 된 치료를 했다면, 그의 코는 지금보다는 덜 빨갛겠지.


어쨌든 산타가 루돌프의 반짝이는 빨간 코 덕분에 세계 아이들에게 줄 선물보따리를 가지고 내비게이션도 없이 하늘을 누비며 아이들 마음속에 잘 찾아가듯, 창수 씨의 빨간 코 덕분에 나는 나의 길을 큰 일탈 없이 잘 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코는 나에게 삶의 방향등이었다. 그 빨간 코 덕분에 우리 가족 모두 큰 고난이나 아픔 없이 지금도 각자의 길을 잘 걷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방향등이 있다. 그 방향등은 사람마다 색깔도 형태도 모양도 다르다. 내가 믿었던 방향등이 잘못된 곳을 비추어 인생의 골짜기로 떨어지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나의 방향등은 추운 겨울에도 부지런이 밖에서 일을 하며 가정을 일구고 자식을 가르쳤던 창수 씨의 성실함과 몸을 쓰는 힘든 일에도 남들은 흔히 하는 술과 담배는 쳐다보지도 않았던 그의 자기 절제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난 48년간 나의 길을 밝게 비추어주었다.


지금도 매우 반짝이는 빨간 코의 창수 씨가 나를 환한 미소로 반겨준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창수 씨는 평생 '안쓰러움'을 가슴에 담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