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성찰
며칠 전 전 직장동료와 왕십리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시간이 되었는데도 친구는 약속장소에 오지 않았다. 휴대폰을 보니 친구에게서 이미 10분 전에 ‘좀 늦을 것 같다’는 문자가 와 있었다. 전화를 해 서점에 있을 테니 천천히 오라고 했다. 숨차게 서점에 도착한 친구는 늦은 연유를 얘기했다.
그녀는 시간 맞춰 나왔는데, 지하철역에서 5만 원 두 장이 포개져 있는 돈 10만 원을 주웠고, 순간 마음에서 이것을 주머니에 넣을까, 지하철역사 사무실에 가져다주어 분실물로 처리할까 고민했다고 했다. 친구는 지하철역사 사무실로 가서 돈을 주웠다고 말하고, 직원과 어느 지점에서 주웠는지 CCTV로 확인하고 직접 가기까지 해서 시간이 좀 걸렸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정말 대단하다. 나 같으면 웬 떡이냐 하고 내 주머니 속에 넣었을 텐데...”
그녀는 웃으며 “지하철에 CCTV 많잖아. 가서 CCTV 보니까 그 지점이 사각지대이긴 하더라. 하하하”라고 말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런 상황은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을 듯하다. 그냥 누군가는 떨어뜨렸고, 누군가는 그걸 주었거니 하고 지나갔는데, 이건 '양심'의 문제이기도 하다. '양심'의 양은 어질다, 좋다는 의미이다. 어진 마음, 좋은 마음이 바로 양심이라는 것이다. 내 지인은 사람의 눈이 아니라 기계의 눈이 무서웠다고 하며 사무실로 돈을 가지고 갔지만, 나는 그녀가 기계의 눈을 의식하리만큼 어질고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했던 in my pocket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힌다. 나는 왜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주머니에 넣으려 했을까? 왜 좋은 마음보다는 사리사욕이 앞섰을까? 좋고 어질었던 내 마음은 자본에 휘청이며 잃은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기보다는 숫자와 그 숫자와 교환할 수 있는 물건을 떠올린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시대가 변하며, 좋고 어질다는 기준이 달라졌다. 그러다 보니, 좋은 마음이라는 양심이 세간에 널리 쓰이지 않고 있음을 발견한다.
양심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쓰였던 시절은 1996년이었다. 한 TV프로그램에서 횡단보도 정지선을 지키는 운전자에게 냉장고를 선물로 주었다. 그때 그 시절 사람들이 정지선을 잘 안 지켜서인지, 모든 차선이 정지선을 지켜야 했기 때문인지 양심냉장고를 받기는 쉽지 않았다. 모두가 정지선 지키는 것이 어렵다는 걸 알고 있어서일까, 그 프로그램은 세간에 화재가 되었고 프로그램 PD인 쌀집아저씨나 프로그램을 진행한 MC 이경규 씨는 유명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함께 사는 사회에 작디작은 정지선 하나 지키는 것조차 그렇게 힘들었었나, 사람이 지켜보지 않는 곳에서 원칙을 지키는 모습이 과연 냉장고를 받을 만큼 칭찬받을 일인가 싶지만, 나는 충분히 그럴만하다는 것을 안다. 여전히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는 행위가 쉽지 않음, 내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동료와의 대화 속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최근 읽은 책 <소년이 온다>와 <죄와 벌>에서 “양심”이라는 말이 많이 나왔다. 마치 양심이란 저 멀리 던져버린 무뎌진 나를 책 속의 인물들이 곁에서 채찍질하는 듯하다. 양심 없는 세상에서 양심을 지키고 키우는 것, 이것이 내가 앞으로 쉽지 않지만 마땅히 해야 할 과제라고 말하는 듯하다.
*참고로, 길가에 떨어진 돈을 주으면....
길에 떨어진 돈이라도 엄연히 주인이 있습니다. 따라서 돈을 주운 뒤 함부로 가져가면 다른 사람의 재산을 함부로 사용한 것과 같은 죄를 짓게 되어 '점유이탈물횡령'의 적용을 받는다고 합니다. (출처: 스마트 서울경찰 Bl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