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의 창수 씨
지난 연말 유명한 소설가 북콘서트에 다녀왔다. 북콘서트는 <여행과 인생>을 주제로 하였다. 콘서트는 소설가의 이름만큼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강연이 끝나고 마지막 질의응답시간에 한 아이아빠가 질문을 했다.
“아이가 어리다 보니 여행에 대해 생각이 많습니다. 지난주 아이와 장모님과 아내와 함께 제주여행을 다녀왔어요. 그런데 아이가 어리다 보니 여행 내내 아이만을 케어하고 있더라고요. ‘집에서 애 보는 것과 뭐가 다른가’라는 생각에 여행이 무의미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래도 여행을 가는 게 맞을까요?”
작가가 말했다.
“아이가 어려서 여행 갔던 장소나 여행의 기억은 아이에게 남아 있지 않더라도 그때 부모님과 함께 했던 그 정서는 아이 몸에 남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가 기억도 못할 텐데 가서 뭐 해...라고 하시지만 그 시절 부모님과 함께 했던 느낌은 남게 됩니다. 꼭 가십시오.”
내가 어릴 적, 창수 씨는 우리 집 뒤에 있는 철둑길에서 우리(언니, 나, 동생)와 달리기 시합을 하곤 했다. 자주 시합을 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아빠와 같이 뛰었던 장면을 몇 초짜리 영상으로 기억한다. 내가 열심히 달려 아빠를 앞지를 것 같으면, 천천히 달리던 아빠가 다시 내 앞으로 쭉 나가버리고, 그리고선 다시 천천히 아빠가 달리면, 나는 이때다 하고 다시 속도를 냈다. 그래서 이길 것 같지만, 아빠는 다시 또 앞으로 달려갔다. 이 몇 초 안 되는 장면을 나는 간직하고 있다. 기억 속에는 달리는 모습과 내 표정과 아빠의 표정, 웃음소리와 웃다가 배가 아파서 뛰지 못할 것 같은 그 느낌까지도 내 안에 자리한다.
시간이 기억들을 하나씩 하나씩 집어 먹고 삼켜 먹고 씹어 먹고 있어 남아 있는 기억이 별로 없지만, 문득 떠오른 이미지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때 내가 열심히 달렸다는 걸, 이 달리기에서 이기려고 최선을 다했다는 걸, 그리고 아빠는 나를 즐겁게 하려고 전속력으로 달렸다가 걷는 것처럼 달렸다가 하면서 장난을 쳤다는 걸, 배를 부여잡고 너무 웃어서 배 아프다고 투정 부렸다는 걸, 더불어 그가 나를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았는지 까지도 말이다. 그 정서, 그 느낌이 나의 어린 시절을 해석하고 내 삶의 동력으로 자리한다.
지금의 내가 어린 시절의 달리기 장면을 꺼내고 그 속에서 많은 소중한 것을 발견하듯, 어쩌면 작가가 말하는 ‘기억은 없지만 어린 시절 몸속에 체화된 여행의 느낌’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지 않을까. 어릴 적 나를 둘러쌌던 기억나지 않는 모든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 것이다. 좋고 기쁜 일만 있으랴, 거기에는 수많은 슬픈 일, 어렵고 힘든 일, 아픈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희망한다. <인사이드아웃>의 기쁨이처럼 내가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도록 나만의 기쁨이가 나의 장기기억장치에서 예쁘고 좋은, 아름답고 소중해 때론 뭉클하고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억들을 종종 꺼내주었으면 좋겠다. 아빠와의 달리기 장면처럼 말이다. 이걸 자양분으로 나는 나의 아이들에게 또 다른 정서와 느낌을 심어주어야겠다. 그들의 장기기억장치에 담겨 가끔씩 꺼내 미소 지을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