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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은우 Dec 23. 2018

딱 한 번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35년 전의 어느 가을날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은 돌아가고 싶은 과거의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인생의 가장 기쁜 순간이든 아니면 가장 슬픈 순간이든 상관없이,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 내게는 1983년 9월 17일이 그런 날 중 하나이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35년 전의 어느 가을날. 오십이 넘는 세월 동안 모래알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날들을 보내왔지만 그 날만은 내 기억 속에서 아직도 또렷하고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 날은 추석을 불과 4일 앞둔 토요일 오후였다. 당시 난 대학입시를 오십 일도 남겨 놓지 않은 고3 수험생이었다. 아버지는 간암 말기였는데 이미 몇 개월 전에 3개월 시한부 인생을 판정받은 상태였다. 언제 돌아가실지 알 수 없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인생의 끝자락을 힘겹게 붙잡고 계셨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아버지께 간단하게 인사를 드린 후 곧장 내 방으로 돌아갔다. 어머니와 누나는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 가게에 나가 있었고, 여동생은 학교에서 오지 않은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를 대신해 아버지의 병간호를 맡은 큰 이모만 아버지 곁에 있을 뿐, 직계 가족은 오로지 나 하나뿐이었다. 

시계를 되돌릴 수 있다면 35년전의 가을로 돌아가고 싶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학력고사가 채 50여 일도 안 남았던 때라 공부를 핑계 삼아 아버지 곁이 아닌, 내 방에 머물러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그날은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난 방바닥에 누워 멍한 상태로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 아버지의 병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음은 분명했다. 의미 없는 몇 시간이 지나고 문 밖으로 어스름하게 어둠이 깔릴 무렵, 갑자기 아버지가 계신 안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무언가 다급하게 내지르는 듯한, 날카롭고 짧은 비명 같은 것이 들리는 듯했다. 순간 내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 소리는 큰 이모가 내지른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고, 육감적으로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느꼈다. 

무엇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스프링이 튕기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당시 우리 집은 판잣집 같은 단독주택이었는데 길게 뻗은 부엌을 지나 마당으로 나온 후 다시 외벽을 따라 기다란 통로를 거쳐야 내 방으로 갈 수 있었다. 그 길을 마치 날듯이 지나 아버지가 계신 안방으로 향했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죽음이라는 단어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제발. 아버지가 살아 계시기만 바랬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라도 살아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길 바랬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후였다. 아버지의 사체 위에는 흰 천이 덮여 있었다. 

맥이 탁 풀렸다. 사람의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얗게 변할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 동안 사람이 죽을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비록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날 오후 봤던 아버지의 모습은 그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실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삶과 죽음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문을 열면 바로 그 너머에 죽음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너무 기가 막혀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겨우 몇 미터 거리에 있으면서도 돌아가시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도대체 무엇이 그리 급하셨을까? 무엇 때문에 겨우 10초도 안 걸리는 그 짧은 거리를 달려오는 것도 못 참아 그렇게 급하게 가셔야만 했을까? 그날 우리 가족들 중 그 누구도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유일하게 집을 지키고 있던 나 역시 아버지의 마지막 떠나시는 모습을 볼 수 없었으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절망스러웠던 순간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을 때였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그날만 생각하면 나는 아직도 가슴이 아려온다.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안타까움과, 아버지 혼자 먼 길을 떠나시게 했다는 죄책감이 뒤범벅되어 뜨겁게 달구어진 쇠꼬챙이처럼 심장을 후벼놓곤 한다. 그래서 그날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난 진저리를 치며 머릿속의 생각들을 떨쳐내야만 한다. 그래도 나의 고통은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 아버지를 생각하면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 없다. 그날, 아버지는 얼마나 외롭고 서러우셨을까? 얼마나 눈을 감기 힘드셨을까? 어린 자식들을 두고 가는 마음이 얼마나 무겁고 한스러우셨을까?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먼 길을 떠나는 순간에도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을 그 누구도 볼 수 없었으니, 그처럼 기구한 운명이 또 있을 수 있을까?

만약 타임머신이 있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망설임 없이 아버지가 임종하시던 그날 오후로 돌아가고 싶다. 더욱 시간을 거슬러 아버지의 병을 막을 수 있는 시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이 아버지의 운명이라면, 적어도 아버지의 임종만은 지켜드릴 수 있는 순간으로라도 돌아가고 싶다. 하루 종일 아버지 옆에 앉아 말동무도 되어 드리고, 북어처럼 마를 대로 말랐던 손도 잡아드리고 싶다. 이 세상을 떠나면서도 결코 내려놓지 못했을 무거운 마음의 짐을 덜어 드리기 위해서, 그리고 먼 길 떠나는 아버지의 여행길이 서럽고 외롭지 않도록 말이다. 살아생전 쑥쓰러워서 한 번도 하지 못했던 말도 전하고 싶다. 사랑했다고, 진정으로 아버지를 사랑했다고. 


딱 한 번만이라도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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