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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은우 Mar 10. 2019

인생에서 처음으로 당황스러움을 느꼈던 순간

자식을 키우며 알게된 부모의 마음

난 책을 읽을 때 밑줄을 그으며 읽는다. 형편없는 작업기억과 이해력 탓에 밑줄을 치지 않고서는 책을 읽을 수 없다. 밑줄 없이 책을 읽고 나면 마지막 책장을 덮는 것과 함께 방금 전에 읽었던 내용들이 모두 머릿속에서 휘발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책을 읽을 때는 반드시 밑줄을 그을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하다. 가끔은 샤프펜슬을 쓰기도 하지만 나는 주로 연필을 사용한다. 샤프펜슬은 기계적이라 날카롭고 차가운 느낌이 들지만 연필은 쓸수록 둥글어지는 게 왠지 인간적인 정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연필심이 종이 위를 달리며 만들어내는 특유의 마찰 감과 연필을 깎을 때 느껴지는 서걱거리는 질감도 내가 샤프펜슬 대신 연필을 좋아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다. 그러다 보니 내 책상 위에는 몽당연필들이 많다. 어떤 것은 길이가 3센티미터 정도로 짧은 것도 있다. 더 이상 손으로 쥐고 줄을 긋기 힘들 정도로 짧아진 연필도 많은데 왜 그렇게 짧은 연필을 쓰는지는 나도 모른다. 


[책을 읽을 때면 늘 함께 해야 하는 연필들]


모든 것이 넉넉해진 지금은 이렇게 연필을 짧게 깎아 쓸 일이 없어졌지만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70년대만 해도 몽당연필을 볼펜 자루에 끼워 쓰는 것은 흔하디 흔한 모습이었다. 연필 한 자루가 소중한 시기였기에 연필이 짧아졌다고 해서 버리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더 이상 깎을 나무가 남아 있지 않을 정도까지 아끼고 아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쩌면 중학교 때까지도 볼펜 자루에 끼운 연필을 쓰지 않았나 싶다. 


책상 위에 뒹구는 몽당연필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어린 시절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아마도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 같다. 하루는 선생님이 다섯 가지 색깔의 색연필을 사 오라고 하셨다. 자상하셨던 아버지는 아침 등굣길에 나를 학교 앞 문방구까지 데리고 가 색연필을 사주셨다. 그런데 아버지가 사주신 색연필은 색깔별로 하나씩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색이 위아래로 붙어 있는 색연필이었다. 선생님은 분명 다섯 자루의 색연필을 가져오라 하셨지만 내 손에는 세 자루의 색연필만 들려 있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지독하게도 가난했기에 아마도 아버지가 가진 돈이 넉넉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날 수업 중에 산수 시간이 있었다. 선생님은 가져온 색연필을 꺼내라고 하셨다. 그리곤 그것으로 덧셈과 뺄셈 수업을 하셨다. 아차! 그 수업을 하기 위해서는 다섯 자루의 색연필이 필요했지만 내가 가진 것은 달랑 세 자루뿐이었다. 그날 난 셋 이상의 숫자는 셀 수가 없었으니 선생님의 수업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때 내가 느꼈던 당황스러운 감정을 지금은 낭패감이나 당혹감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그때의 내 심정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것이었다. 정확히 기억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당황스러움을 느꼈던 순간이었다. 얼굴은 새빨개졌을 것이고 분명 다섯 자루의 색연필 대신 세 자루의 색연필을 사준 아버지를 원망했을 것이다. 


짧아진 몽당연필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때 일이 떠올랐다. 이후 일은 어찌 되었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내가 느낀 당혹감을 쏟아냈는지, 아니면 친구들과의 놀이에 빠져 그 일을 까맣게 잊고 넘어갔는지 알 수 없다. 무심코 손을 넣은 겨울 코트 속에서 까맣게 잊어버리고 지냈던 지폐가 발견되듯, 살아오면서 가끔씩 그날의 기억이 뜬금없이 떠오를 때가 있다. 이 나이가 되도록 그때의 기억을 잊지 못하는 걸 보면 그날의 일이 내게는 꽤나 큰 상처로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그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아셨을까? 만약 아셨다면 어떤 심정이었을까? 미루어 짐작하건대 무척이나 마음이 아프셨을 거다. 그런 상황에서 마음 편한 부모는 없을 테니 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나이보다 더 많은 나이를 살아오면서, 가끔은 그때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보게 될 때가 있다. 비록 나는 힘들고 어렵더라도 내 아이들에게만은 부족함 없이 모든 것들을 베풀어주고 싶지만, 큰 산의 정상과 밑바닥을 오르내리듯 끝없이 삶의 부침을 거듭하다 보면 그것이 마음대로 안 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겉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곤 한다. 아마 그때 아버지의 심정도 그랬을 것이다. 특히나 우리 남매에게는 한 없이 인자하고 자상했던 아버지였기에 그 자식들이 곤란한 일을 겪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아버지는 심한 자책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만일 내가 그때의 아버지가 처한 입장에 놓였다면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으리라.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이란 똑같지 않겠는가?]


부모란 그런 존재가 아닐까 싶다. 자신은 먹고 싶어 군침을 흘리면서도 꾹 참아야 하는 맛난 음식도 아이들 입에는 넉넉하게 넣어주고 싶고, 자신은 다 해진 신발 하나 새로 사 신지 못하면서도 아이들은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는 멋진 신발을 신기고 싶고, 자신은 젊은 시절 꿈을 꾹꾹 눌러가면서도 아이들에게는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은 것이 부모일 것이다. 비록 자신의 몸과 마음은 피폐할지라도 아이들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키우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 아니겠는가. 어쩌면 인생에서 처음으로 당황스러움을 느꼈던 날, 난 아버지에게 화풀이를 하고 그 가슴에 대못을 박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이 들고 내가 부모의 입장이 되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 가슴에 대못이 박히더라도 그 아픔보다는 내 자식이 받았을 마음의 상처가 못내 더 아프고 쓰라린 것이 부모의 마음이라는 것을. 때로는 가난만 남겨 놓고 떠나버린 아버지가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안다. 그 가난조차도 더 이상 떨어지지 않도록 꼭 붙들어맸던 아버지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비록 들을 수는 없겠지만 그런 아버지를 향해 한 마디 해드리고 싶다. 


"아버지. 괜찮습니다. 저는 언제나 아버지가 자랑스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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