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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은우 Mar 24. 2019

우리는 왜 행복하지 않을까

무관심 사회에 대한 안타까움

2017년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거의 모든 날들이 영하로 곤두박질쳤고, 어쩌다 길을 걸을 때면 걷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매서운 한파가 몰아닥쳤다. 가릴 수 없어 드러내 놓은 얼굴 위로 칼바람이 송곳으로 찌르듯 날카로운 아픔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렇게 지독한 추위가 몰려오던 어느 겨울날 일어난 일이었다. 강의를 하기 위해 강의장이 있는 여의도 국회의사당 전철역을 나서는 데 나이 든 할머니 한 분이 전단지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조금만 서 있어도 온 몸이 동태처럼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를 무릅쓰고 전단지를 나누어 주는 할머니의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전단지 한 장 나누어 주고받는 수입은 땅에 떨어져 있어도 줍지 않을 정도로 적은 푼돈에 불과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제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맡은 바 책임을 다하기 위해 꿋꿋하게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입구에 다다르길 기다리는 동안 줄곧 할머니를 지켜봤지만 안타깝게도 날씨가 추워서인지 누구도 전단지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대략 이삼십 번 손을 내밀면 겨우 한 번 정도 받아줄까 하는 정도였다. 잠시라도 주머니에서 손을 빼는 것조차 고통스러울 정도로 날씨가 추웠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날카로운 비수로 얼굴을 할퀴듯 칼바람이 몰아치건만, 한쪽 손에 두툼하게 쌓인 전단지는 도무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의 입장에서는 전단지를 다 돌리기 전에는 집에 돌아갈 수 없을 텐데 내미는 손을 매몰차게 무시하고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팠다. 할머니의 속마음은 얼마나 타들어 갔을까? 손을 내밀어 전단지를 받았다. 마음 같아서는 손에 든 전단지를 모두 받아주고 싶었지만 한 장 밖에 받을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아무런 관계도 없지만, 그날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꽤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전단지를 내미는 손을 무시하고 종종걸음을 걷는 사람들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그 날 날씨는 말 그대로 얼어 죽을 정도로 추웠으니까. 지독히도 추운 날씨 때문에 숨쉬기조차 힘들었으니까. 그런데 만약, 그 전단지를 나누어 주는 사람이 내 어머니라면 어땠을까? 혹은 나의 이웃이나 내가 아는 주위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춥다는 핑계로 내민 손을 매몰차게 거절할 수 있을까? 걷기도 힘든 추위에 그 할머니는 춥지 않았을까? 오히려 움직이지도 못하고 한 자리에 선 채 전단지를 나누어 주자면 뼈 속 깊이 스며드는 한기를 느낄 텐데 말이다. 견딜 수 없이 춥고, 그래서 손을 꺼내는 것조차 귀찮아도 모두가 한 마음으로 손을 내밀어 전단지를 받아 주었다면 그 할머니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따뜻한 온기가 담겨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무심하게 전단지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무관심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마디로 무관심 사회가 되고 만 것이다. 


‘지금 당신의 삶은 행복하십니까?’


누군가가 이렇게 묻는다면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의 만족도는 OECD 국가 중에 최하위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당장 끼니를 때울 것이 없어, 먹고사는 것이 최우선 순위였던 과거에 비해 지금은 적어도 그런 걱정에서는 자유로워졌음에도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의 수준은 과거에 비해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과거에 비해 삶이 더욱 팍팍 해졌다는 느낌이 든다. 왜 그럴까? 그건 아마도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무관심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회가 변하고 도시가 발달함에 따라 사람들의 소득 수준은 향상되었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개인의 삶을 안정적으로 꾸려나가기에도 벅찬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내 코가 석자’라는 속담처럼 내 앞가림이 어려워지면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진학에 대한 걱정, 취업에 대한 걱정, 경제적 안정에 대한 걱정, 미래에 대한 걱정 등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걱정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끊이지 않고 찾아온다. 끊이지 않는 자신에 대한 걱정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을 잃게 만들었고 그것이 무관심 사회를 불러오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는 필연적으로 삶에 대한 만족감, 행복에 대한 체감효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행복의 90%는 인간관계에서 온다고 했다. 사람의 뇌가 몸무게에 비해 지나치게 커진 대뇌화는 사회적 활동을 더욱 잘하기 위한 진화의 산물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인간에게 있어 잊히지 않는 가장 큰 고통은 사회적 관계에서 얻은 것이라고도 한다. 그만큼 인간은 싫든 좋든 다른 인간과 살을 맞대고 부대끼며 살아가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이다. 우리가 못 살았던 과거를 돌아보며 그때가 살기 좋았다고 하는 것도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무관심 사회로 변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우리가 평소 접하는 인간관계의 범위와 질을 따진다면 몇십 년 전의 그것보다 훨씬 나빠져 있지 않을까 싶다.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의 숫자도, 그들과의 관계의 밀도나 질도 예전만큼 못함이 분명하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도록 만드는 원인인지도 모른다. 페북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온라인에서는 친구가 넘쳐나지만, 막상 오프라인에서는 같이 밥을 먹을 사람이 없어 점심을 굶거나 화장실에 숨어 밥을 먹고, 만날 사람이 없어 방구석에 틀어박혀 좀비처럼 하루를 보내고, 같이 어울릴 사람이 없어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행복이란 어쩌면 사치에 가까운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타인에 대한 무관심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무관심은 타인에 대한 배려를 앗아간다. 배려는 사람에 대한 관심이 있을 때만 나타나게 돼 있다. 온갖 근심거리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곱은 손을 비벼가며 전단지를 나누어 주는 할머니는 관심 밖이다. 관심이 없으니 손을 내미는 배려가 따라올 수 없다. 번거롭고 수고스럽더라도, 비록 받자마자 쓰레기 통으로 직행할지라도,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을 이겨내며 힘들게 내미는 전단지를 한 장 받아주는 것이 누군가의 소중한 어머니 혹은 누군가의 이웃일 수 있는 그 할머니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누구도 하지 않는다. 삶은 갈수록 편리해지고 있지만 그에 비례하여 삶의 질은 더욱 팍팍 해지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모두 행복을 꿈꾼다. 사는 동안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이 누구나 갖는 바람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행복을 꿈꾸면서도 정작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에 대한 관심보다는 돈이나 성공과 같은 물질적 수단만 쫓는다. 마치 행운이라는 이름의 네 잎 클로버를 찾느라 행복이라는 이름의 세 잎 클로버를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어리석음처럼 말이다. 달라졌으면 좋겠다. 주위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무관심 사회에서 벗어나 서로가 서로를 보듬고 아끼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누군가가 힘겨워할 때 그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눈길 하나만으로도 그 사람은 힘을 낼 수 있다. 반대로 내가 힘들 때 누군가가 따뜻한 손길을 건넨다면 그건 또 나를 일으켜 세워주는 힘이 되지 않을까? 타인에 대한 무관심으로 똘똘 뭉친 이 사회를 벗어나 서로 따뜻한 온기를 나누는 세상이 된다면 적어도 물질을 쫓는 것보다는 삶이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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