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병에 걸렸다가 겨우겨우 회복했다. 병명은 번아웃(burnout). 네이버 영어사전에 따르면 크게 두 가지 뜻으로 풀이되는데, 첫 번째는 '(신체적 또는 정신적인) 극도의 피로'를 뜻하고 두 번째 뜻은 '(로켓의) 연료 소진'이다. 나는 2번이었다. 연료가 소진되어 나를 더 태울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평소 에너자이저란 찬사(?)를 받았던 나는 왜 소진되었나, 에 관한 답은 내가 이미 인지하고 있으므로 질문을 바꾼다. 나는 어떻게 연료를 다시 채웠나?
답은 책이었다. 뭐야, 그걸 누가 몰라? 파스스 김 빠지는 소리 하고 앉았네, 라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 나에게 첫 번째 땔감이 되어준 책은 야야 헤릅스트(저자명 외우는 게 너무 어렵다)의 <피해의식의 심리학>. 번아웃 와중에 내 마음에 덜컥 내려앉아 오래도록 떠나지 않은 단어, '무해함'에 관하여 골똘히 생각에 잠겼을 때 폭풍검색 끝에 얻은 책이다. 왜 사람들은 무해한 존재에게 찬사를 보낼까? 왜 무해함을 증명해야만 하는 사회가 됐을까? 조금이라도 유해하다고 판단된 사람들은 왜 '취소(cancel)'를 당할까? 그런데 말이지, 인간 때문에 촉발된 기후위기니 뭐니 하는 현대사회에서 과연, '무해한 인간'이란 게 존재하기는 해?
자본주의 현대사회에서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절대 밑져선 안 돼(손해), 생명이나 신체, 재산, 명예 따위에 손해를 입어선 안 돼(피해), 이런 생각들이 똘똘 뭉쳐서 현대사회의 트렌드(?)로 자리잡은 게 바로 무해함 아닐까 싶은 것이다. 야야 헤릅스트(이름 점점 외워지는 중)에 따르면 우리는 상대방을 가해자로 지목해 책임을 전가하거나, 아니면 삶 자체, 힘겨웠던 어린 시절, 주변 환경, 불운 등 막연한 대상을 가해자로 지목한다. 왜? 누구를 향한 것이든 상관없이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는 나의 마음을 무척 가볍게 하니까.
예컨대 매일 새벽 분주히 아침상을 차릴 때마다 우리집 2호는 (요리하느라 바빠 죽겠는) 나에게 안아달라고 보채는데, 내가 안아주고 다시 부엌으로 가 버리면 레퍼토리처럼 읊는 대사가 있다.
"엄마는 나쁜 아이야."
"?!!!"
에미인 나는 억울하지만 어디 억울함을 호소할 데가 없다. 4살의 마음이란 그런 거니까. 4살 아이를 붙잡고, 내가 왜 나빠? 너 왜 날 억울하게 만들어? ㅅㄲ야, 라고 호소할 순 없잖은가. 그런데 이런 화법은 4살뿐 아니라 성인들에게도 널리 사용되는 화법이었다. 바로 이인칭 화법. '우리는 이인칭 정보를 통해 자신의 원래 생각과 느낌을 안전하게 감추었다는 착각을 하'지만, 그럼으로써 상대방에게 '상황의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하지만 화법을 해체해보면 본심이 드러나고 마는데.
-이인칭 정보: 엄마는 나쁜 아이야.
-암호화된 이인칭 정보: 난 엄마가 나쁘다고 생각해.
-일인칭 정보: 엄마가 날 안아주지 않아서 내 마음이 안 좋아졌으니까, 나는 엄마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싶어.
결론은 우리는 4살이 아니니까, 다 자란 어른이기에,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결국 일인칭 화법을사용해야하고 이를 부단히 연습해야 하는데...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