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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뚜루 Aug 10. 2021

제법 괜찮은, 어린이라는 세계

앞니는 잃었지만

어린이가 시간을 지체하면 일부러 꾸물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어렸을 때 기다려주는 어른을 만나지 못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지금 어린이를 기다려 주면, 어린이들은 나중에 다른 어른이 될 것이다. (중략) 느긋한 어른이 되는 것...


김소영의 에세이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는 중이다. 어린이책 편집자와 독서교실 선생님으로 이십 년 남짓 일해온 저자와 비교하면 나의 어린이 관련 경력은 겨우 만 6년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세 자녀의 엄마 자격으로 썰을 풀어보겠다.


내가 경험한 어린이라는 세계.



하나. 우리집 3호(쌍둥이 동생)가 거실 한가운데에서 유선 전화기를 휘두르며 놀고 있었다. 좌로 흔들어, 우로 흔들어 혼자 잔뜩 신이 났는데 워낙 골격이 크고 힘이 센 아기라 어쩐지 사달이 날 것만 같았다.


골프채로 풀스윙하는 줄?하마터면 곁에 있던 2호(쌍둥이 형) 뺨다구에 스윙을 날릴 뻔했다. 안 되겠다 싶어서 가젤을 노리는 사자처럼 3호 뒤로 슬금슬금 접근했다. 뒤에서 포박하고 전화기를 뺏어야지! 그게 내 야심찬 계획이었다. 계획이었는데...


빡!!!!!!

아그작...!!!


뭐지? 평생 친구를 잃은 것만 같은 이 느낌은? 우수수수... 하얀 돌가루들이 내 입 밖으로 흘러 내렸다. 왜 내 입에서 거친 입자가 느껴져? 설마 이빨은 아니지? 그래, 아닐 거야. 겨우 2살 아기인데 에이 설마..^^


...가 맞았다. 그건 지난 30여년 세월 나에게 물고 뜯는 재미를 알려준, 향후 백 세 시대에 걸맞게 나와 죽을 때까지 함께 가야만 했던 내 앞니 친구였다. 그런 소중한 친구가 2살의 스윙 한 방에 박살나다니..


간신히 앞니 본체를 찾아 치과로 달려갔는데 의사 선생님 왈. "아이고 이건 뭐 애한테 화를 낼 수도 없고, 그치영?^^" 아니 선생님 지금 나 약올리세요?ㅠㅠ 결국 30만원 가까운 거금을 주고 레진으로 가짜 앞니를 때웠다. "앞으로는 평생 앞니로 안 씹는다고 생각하세영, 알겠지영?^^" 아몰랑 내 친구 돌려줘!!!


(느긋한 어른이고 나발이고) 아.. 어린이라는 세계...



둘. 여섯 살 조카가 있다. 이름은 금동이(가명). 이 녀석은 우리집 3호에 비하면 몸집이 작고 비실비실한데 역대급 어린이 캐릭터라는 점에서 3호와 용호상박이라 하겠다.


하루는 언니가 아들 금동이와 함께 장례식장에 갔다. (코로나 전이었음) 여느 빈소와 마찬가지로 고인의 빈소엔 조문객이 각자의 종교 성향에 맞게 조문할 수 있게끔 하얀 국화꽃과 향이 마련되어 있었다. 언니가 헌화를 하고 유족을 위로하고 있는 찰나, 난데없이 생일 축하 노래가 빈소에 울려 퍼졌다. 금동이의 목소리였다.


"생일 축하합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 언니는 홱 고개를 돌려 금동이를 쳐다봤다. 언니 곁에 섰어야 할 아이는 저 멀찍이 고인의 영정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곤 입에 한가득 바람을 넣더니 향불에다 대고 후우우! 심지어 박수까지.. (충격에 빠진 언니의 표정은 생략하기로 하자)


(느긋) 아.. 어린이라는 세계... (부들부들)



셋. 우리집 1호가 7살 때였다. 몸싸움만 없다뿐 큰 소리로 부부싸움이 벌어지고 있는데 1호가 와락 나에게 뛰어들더니 울먹거렸다.


"엄마 아빠 결혼 취소하면 나 사라진단 말야."


아니, 사람이 물거품도 아니고 사라진다니?!  마음이 저릿했다. 너무나 진지하게 울먹이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더 이상 내가 잘났네 네가 못 났네 감정 다툼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날 우리 부부는 아이의 강력한 말 한마디로 급작스레 종전을 맞았다. 


아!  어린이라는 세계!!



지금도 나는 어린이라는 세계에서 유영 중이다. 때로는 아작나고 때때로 포복절도하며 이따금 가슴뻐근한 세계를 맞이하지만 여기서 길어 올리는 찰나의 순간들은 나에게 충분한 가치가 있다. 퇴근길, 곧 집에 도착해 현관을 열면 내 어깨 위로 올라탈 서커스 곡예단 2호, 3호가 조금은 두렵기도 하지만, 괜찮다. 이 세계는 제법 괜찮다.


으랏차차! 곰돌이도 옮길 태세의 3호. 애미의 앞니와 맞바꾼 모정ㅋㅋㅋ 어린이니까 봐준다. 따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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