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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뚜루 Sep 08. 2021

내가 겪은 공립초 선생님

녹색학부모회

녹색 봉사활동 안내

1학년 ○반 학부모님, 안녕하세요?
녹색 학부모회 봉사활동에 적극 참여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며칠 전 8살 딸아이학급에서 공문이 내려왔다. 순간 응? 녹색 봉사활동? 뭔 소린가 했다. 준비물에 적힌 깃발호루라기를 보고서야 알았다.

"아, 녹색어머니회 말하는 거구나!"


입학 무렵 학교에서 내려온 전체 공지사항엔 분명 '녹색어머니회'라고 적혀 있었다. 당시 육아휴직 중이었던 나는 (단어가 불편하긴 한데) 그래, 1년에 한 번뿐인데 해야지, 라는 생각으로 자원 의사를 밝혔는데 내 차례가 돌아온 것이었다.


불과 6개월 전만 하더라도 '녹색어머니회'라고 적혀 있던 문구가 학급 공문에선 '녹색학부모회''녹색 봉사활동'으로 바뀌어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들썽거렸다.




종이로 출력된 엄숙한 공문에서 성구별을 하지 않은 단어를 발견한 건 오랜만이었다. 딸이 어린이집에 다닐 때만  집으로 숱하게 날아드는 공문에는 모든 양육의 책임이 '엄마'를 향하고 있었다.


- 소풍을 갑니다. 엄마표 도시락을 준비해주세요.
- 어머니의 솜씨를 보여주세요.
- 책 읽어주는 엄마 행사에 자원하실 어머니들은..
- 운영위원회 어머님들은..


어머니 어머니 그놈의 어머니.. 엄마는 뭐 집에서 노냐? 아빠는 도시락 싸면 안 돼? 독박육아를 조장하는 단어들에 불편한 마음들이 쌓여갔다. 한번은 성평등 용어를 써달라는 의견을 슬쩍 흘려도 봤지만, 굳어진 관행은 쉬이 물러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 반가웠나 보다. 녹색학부모회라는 말이, 녹색 봉사활동이라는 말이. 그런 공문을 보낸 담임 선생님 무척 고마웠다. 심지어 선생님은 이런 주석을 덧붙이셨는데.


아버님께서 봉사해 주시는 분은 녹색실에 들어가실 때 꼭 한번 노크를 하고 들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어머님들께서 의상을 바꿔 입고 계실 때가 간혹 있다고 합니다. 또 체격이 크신 아버님들은 의상이 잘 맞지 않을 경우 조끼를 이용하시면 좀 더 편안하실 것 같습니다.


녹색 활동엄마뿐 아니라 아빠의 활동이라는 것, 제한된 공간에서의 배려를 당부하는 배려까지. 당연한 관념을 당연하지 않게, 당연하지 않은 배려를 당연하게 만드는, 문장의 힘.  글에 나는 안도했다. 아, 우리 딸이 좋은 선생님에게 배우고 있구나.


지난 4월 16일이 떠오른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아이가 다짜고짜 엄마를 붙잡고 했던 말.


딸: 엄마, 엄마!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
나: (모르는 척) 무슨 날인데?
딸: 언니 오빠가 돌아가셨는데, 그걸 기억하는 날이래.
나: 누가 말해줬어?

딸: 응, 학교에서 선생님이!! 어른들 잘못으로 언니 오빠가 돌아가셨는데 그걸 기억해야 우리가 안전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가 있대.  
나: ...!!!


단 한 번도 선생님과 이런 주제로 사담을 나눈 적 없는데, 오늘은 셀프 고백해보고 싶다. (선생님은 뚜루를 모르시니까^^)


쌤, 쫌... 멋져요! 

그리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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