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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뚜루 Sep 14. 2021

초1 딸이 갑자기 시를 써요

무지개 같은 기적

지난 일요일, 간만에 아이들과 바깥 바람 좀 쐬고 집에 돌아왔다. 몸이 천근만근 아니 억근조근 무거웠다. 바닥에 철퍼덕 쓰러지는 애미를 노룩패스하더니 자기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딸 유니아카, 책상에 떡 앉더니 하는 말.


엄마, 나 시 쓸래.


.......응? 갑자기? ○_○

세상에! 우리 딸이 시를 쓰고 싶어 한다니 기특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는커녕 '아싸! 안 그래도 피곤해 DG겄는데 잘 됐다. 한 명 제꼈다, 아싸! 나머지 2호, 3호는 어떻게 제끼지.'라는 현실적인 생각이 스쳤다.


딸은 딸대로 나는 나대로 (욕실에서 쌍둥이의 옥체를 씻기며) 하얗게 불태우고 있는데, 유니아카가 시를 적은 스케치북을 부욱 찢어 가져오더니 내 앞에서 낭독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유니아카: 엄마, 들어봐.
-뚜루: (영혼 없음) 어어, 듣고 있어.
-유니아카: 제목, 시간이 흘러가는 밤.
-뚜루: (장난치는 쌍둥이의 옥체를 힘겹게 씻기며) 아잇, 가만 있어 봐.

-유니아카: 아침은 밤까지....#^#%#○◇●♧●$
-뚜루: (안 들림, 육아전투 중) 아오! 가만 있으랬지!!

-유니아카: #^#%%@... 생긴다. 끝!  엄마 어땠어?
-뚜루: (못 들어놓고) 와.. 잘 썼다. 진짜 좋다.


영혼이란 1도 없는 리액션으로 대꾸하고는 가까스로 목욕노동을 마무리했다. 또 철퍼덕 쓰러진 애미. 그제야 유니아카가  놓고 간 스케치북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시를 눈으로 읽는 순간..!!


아니, 천잰데?!!! 초1 맞아?



근데... 나는 너대로, 너는 나대로, 라니? 요즘 트렌드랑은 좀 안 맞는데?(뚜루는 트렌드 좀 아는 뇨자^-^) 요즘 갬성은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인데... 딸이 대체 어떤 연유에서 그런 문장을 적었을까 궁금하여 물어보았다.


-유니아카: 응, 그래야 안 싸우고 같이 놀 수 있지. -뚜루: ......!!!


이런 심오한 철학이 담겨있을 줄이야. 삶이란 자기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라는 진리를 아이는 깨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 잘났다고 괄괄, 너는 너 잘났다고 괄괄. 이러면 둘은 결코 행복할 수 없음을 아이는 직관적으로 깨달았나 보다. 서로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고 온전히 상대방으로 살아보는 것.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순간 비로소 무지개 같은(무지 개같은 아니고ㅋㅋ) 기적이 펼쳐진다는 것을 아이는 알고 있었다. 그토록 너른 마음이라니!


내가 직찍한 무지개의 기적. (우리집 아님 주의ㅋㅋㅋ)



유니아카가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또 하나의 시. 제목은 하나의 홀이었으니.



아니 대체 뭘 빠라들이는(초1임. 오탈자 양해 바람ㅋㅋ) 거냐 물었더니 서로의 괴로움을 빨아들이는 거란다. (진공청소기야?ㅋㅋ) 오타에 한번 웃고 어린이다운 명랑한 해석에 또 한번 웃었다. (진짜 빵 터짐)



지인에게 이 시를 보여줬더니 학원 어디 보내냐고, 자기 아이도 보내겠다고 성화다.(물론 농담임^-^) 비결이 뭐냐는 지인의 말에 난 단호하고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답해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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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몰라ㅋㅋㅋ 난 내 할 일 한 것밖에 없는데?!


아이가 놀아달라건 말건 굳건히 드라마 대본 습작 쓰기, 같이 전체관람가 영화를 보더라도 내가 보고 싶은 거 고르기, 내가 쓴 글 일방적으로 읽어주기 등등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거 했어...


내 삶을 아이에게 애써 끼워 맞추지 않아도 엄마의 삶은 그럭저럭 잘 굴러간다. 엄마가 좀 이기적이면 어때. 이기적으로 살아도 무지개 같은 기적은 찾아올 수 있다. 


* 나, 김뚜루는 이 글을 통해

세상 모든 부모의 자책감을 빠라들일 것이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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