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데 안 즐거운, 숙직하는 날이다. 오전 오프라서 즐거운데, 회사에서 야근할 거 생각하면 하나도 안 즐거운 하루의 시작을 가벼운 산책으로 열었다. 발길이 닿은 곳은 동네 공원(인데 사실은 애국선열들이 영면해 있는 엄청난 곳임). 밤새 수북이 쌓인 플라타너스잎이며 단풍잎이 잔바람에 풀썩이고 있었다.
여러 코스 중 은행잎이 잔뜩 깔린 옐로우 카펫길로 들어서는데 두 명의 중년여성이 앞서 걷고 있었다. 어떤 이는 사락거리는 낙엽 소리가 정겨운지 낙엽을 사붓하게 밟는가하면, 또 어떤 이는 '축구심'이 발동했는지 플라타너스 낙엽만 골라 뻥뻥 발로 차는 생활체육을 시연하고 계셨다. 낙엽을 거니는 방식도 취향에 따라 다르구나, 생각에 이르자 풉 웃음이 났다.
그분들의 고요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문득 빨리 자리를 비켜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워워킹으로 중년여성들을 스윽 앞질렀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생각하는 순간 다리가 삐끗 풀렸다. 아악! 내적 비명. 나자빠진 나는 그분들이 행여나 내 걱정에 달려와 나를 일으켜 세울까 봐(솔직히 말하면, 쪽팔렸다)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내달렸다. 내달렸고 내달렸는데.
와아!낙엽 뭉텅이로 뒤덮인 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길과 길섶이 모두 낙엽으로 덮인 몽환적인 장면에 나는 탄식을 내지르고 말았다.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숲인지 전혀 구별이 가지 않는 곳. 오로지 나무기둥 같은 울타리만이 길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길은 만들어가는 것일까, 만들어진 것일까, 울타리(선)는넘어야 하는 것일까, 넘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잠시 혼란스러운 생각에 잠겼다. 그 정적인 혼란을 깨뜨려준 것은 어르신의 당찬 기합 소리.
으헉! 헙! 으헉! 헙! 모퉁이 둔덕에서 엄마뻘로 보이는 여자 어르신이 두 나무의 기둥을 붙잡은 채 기합을 내지르고 계셨다. 흡사 일어선 채 팔굽혀 펴기를 하는 듯도 하고, 기필코 두 나무의 정기를 빨아들이겠다는 일종의 선언 같기도 해서 나는 넋을 놓고 그 모습을 지켜... 보려 했지만 어르신이 눈팅하는 내 존재를 알아차리는 바람에 곧장 자리를 떴다.
둔덕 아래로 생활체육 시설이 보였다. 꽤 많은 어르신들이 각자 하나씩을 맡아 몸을 단련하고 계셨다. 나무와 씨름하고 계신 분도 있었다. 마치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라는 가사에 맞춰 쎄쎄쎄를 하듯 나무 기둥과 맞박수를 치는 할머니. 그래, 박수만큼 혈액순환에 좋은 게 없지. 게다가 울퉁불퉁한 나무와의 박수라니, 꽤 경지에 오른 생활체육인의 면모를 보는 듯했다.
앉아서 운동하는 기구를 그네 잡아밀듯 밀어올리며 어깨를 쭉쭉 펴는 할머니도 열성적인 생활체육인이었고. 오십견 운동 기구에 매달린 채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오기를 부리는, 한 바퀴 빙글빙글 도는 할아버지도 열성적인 생활체육인의 모습이었다. 나이 지긋한 분들이 모인 곳에 20대 청년들이 철봉에 매달려 끼득거리는 모습도 그저 정겨운, 생활체육인들의 현장.
나도 나무든 철봉이든 기구든 뭐 하나 붙잡고 매달려야 마땅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관찰자에서 행위자로 변하기엔 관찰이 너무 즐거웠으므로 계속 지켜만 보았다. 으쌰으쌰 생활체육인들의 활기를 뒤로 한 채 길을 따라 쭉 걸으니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 한편에 나란히 선 한옥 느낌의 건물들을 보면서, 와 운치 있다, 라고 생각해야 하지만 알고 보면그 건물은 매점과 화장실. 나는 화장실이 저렇게 멋질 일인가? 스스로에게 물으며 공원을 살포시 빠져나왔다.
좌 매점, 우 화장실
참. 그나저나 브런치 결산 리포트라는 것을 받아보았는데 누적 뷰가 52.5만이었다. 내 글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앞으로는... 더 가볍고 무게 없는 글을 쓰리라 다짐했다ㅋㅋㅋㅋㅋ(글쓴 지 4개월밖에 안 됐는데 5년차 작가인 이유는 5년 전에 가입해놓고 글을 안 써서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