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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뚜루 Dec 28. 2021

어려서부터 생일이 싫었다

오늘과 24년전 생일 결산

어려서부터 생일이 싫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핫한 셀럽인 예수님과 생일이 겨우 (그것도 하필이면 뒤로) 이틀 차이인지라 늘 후순위로 밀리곤 했다. 부모님이 사오신 케이크 위엔 늘 '메리 뚜루스마스'가 아닌 '메리 크리스마스' 장식이 얹혀 있었다. 한번은 너무 억울한 기분이 들어 동네 빵집들을 들쑤시고 다니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지금 크리스마스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이틀 전 케이크를 파세요? 라고 일갈하고 싶었으나 난 작고 조그만 존재였으므로 그 생각들은 기억으로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그 케이크마저도 곧 감지덕지한 일이 되었다. 부모님은 점점 성탄절과 내 생일을 동시에 기념하기 시작하셨다. 케이크 하나로 두 기념일을 퉁치려는 (당시 내 입장에선 고약했던) 전통은 여러 해 지속되었다.


"어차피 이틀 뒤면 뚜루 생일이니까 기왕 케이크 산 거 같이 축하하자."


그렇게 나는 희고 폭신폭신하고 이따금 딸기가 콕콕 박힌 생크림 케이크를 먹는 대신에 늘 산타나 루돌프가 올라간 크리스마스 케이크에 기생한 채 내 생일을 기념하게 되었다. 평생을 남의 집 단칸방에 얹혀 사는 기분이었달까. 내 생일보다 성탄절을 중요하게 여기는 부모님 따위 필요없어, 난 친구랑 놀 거야! 라고 호기롭게 다짐도 해봤지만 불행히도 내 생일은 겨울 한가운데에 있었다. 12월 27일은 늘 겨울방학이었고 친구들은 방학 중에도 각자에게 주어진 일정을 소화하느라 바빴다. 외로웠던 것 같다. 기대하면 실망하는 법이니까 기대감이라는 감각을 애써 무력화시키고 무디게 만들었던 듯하다. 어른이 되어서는 "생일? 그게 뭐? 365일 중 하루일 뿐이지 뭐." 이런 찌질한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으니.


그럼에도 올해 생일은 좀 특별했던 느낌이다. 남편은 소고기미역국만 알던 내게 삼선해물미역국이라는 새로운 미역국 장르를 보여주었고, 유니아카(초1 딸)는 작년보다 멋들어진 생일 축전(?)을 보내왔고, 제법 언어를 구사할 줄 알게 된 3살 쌍둥이들은 "엄마, 오늘 생일이야?"인지 "엄마, 오늘 생일이야!"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억양으로 잔뜩 흥분한 채 내 생일을 힘껏 축하해주었다. 심지어 쌍둥이들은 내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큰 초와 작은 초 여러 개를 바스러뜨리고 말았는데, 덕분에 나는 케이크에 작은 초 5개만 꽂고 5살이 되는 영광을 누려볼 수 있었다. (아들들아 고맙다. 덕분에 심하게 젊어졌어ㅋㅋ) 그 고사리손이 준비했다던 생일 선물은 뚜껑 절반이 쪼개져 당장 내갖다 버려도 시원찮을 휴대용 조명이었다. 3살짜리 2호는 그 조명에 불을 올리며, "엄마 선물"이라고 해맑게 말했다. 고마워. 이런 선물 평생 처음이야.


유니아카의 생일 축전

올해 유난히 많은 지인들로부터 축하 연락을 받았다. 카톡 선물도 꽤 많이. 누군가에게 시간이나 돈을 쏟는 게 쉽지만은 않은 시대를 살아가기에 그 정성들이 고마웠다.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그 마음 꼭 기억해야지.


문득 초등학교 6학년 때 쓴 일기장을 들춰보고 싶어졌다. 20여년 전 12월 27일 생일은 어땠을까. 또 예수님 케이크랑 겸상을 했으려나, 합리적인 의구심을 갖고 종이를 넘기는데 아니나 다를까 겨울방학이라 친구를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단다. 대신 한 친구로부터 선물을 받았고, 또 다른 친구로부터 축하 전화를 받았다고 적혀 있었다. 사실 그보다 더 눈길을 끈 것은 생일 전날 일기였는데 제목과 첫줄부터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으니.


제목: 내일은 내 생일
첫줄: 내일이 바로 내 생일이다. 나의 생일이 바로 1985년 12월 27일인 것이다~!!  


뭐야. 그때 나, 잔뜩 기대하고 있었네. 피식 웃음이 났다. 겉으로는 생일 그까이꺼 뭐? 아무렇지 않은 척하더니 속으로는 무지 기대하고 있었구나. 그리고 첫줄과 이어지는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아빠가 5000원을 주셨지만...
그걸 가지고 무얼 하나?"



그랬구나. 그때 아빠가 5000원을 주셨구나. 아니 그걸 가지고 진짜 무얼 하나?ㅋㅋㅋ 초딩 6학년의 생각을 똑같이 읊조리다가 당시 물가가 궁금해졌다. 5000원으로 뭘 할 수 있었지? 검색해보니,


시내버스 400원, 지하철 400원, 택시 1000원
빼빼로 200원, 메로나 200원, 새우깡 400원
삼겹살 600g 3066원, 소주 1병 750원
치킨 8500원, 햄버거 2300원


그랬다. 아빠는 어린 나에게 빼빼로 25개를 사먹을 수 있고, 삼겹살 1.5인분을 먹을 수 있으며, 소주는 6병을 깔 수 있는, 택시를 5번이나 탈 수 있는 돈을 주셨구나. 그러나 5000원의 진짜 위력은 그게 아니었다. 그때 아빠가 주신 5000원은 1997년의 5000원이었다. 아빠가 나에게 돈을 주셨던 1997년 12월 26일자 신문 기사 제목을 몇 개 찾아봤다.


금융기관 정리해고 초읽기
해고 등 근로자 고통감수 불가피
고통 감수해야 IMF 극복
자영업자의 하소연


그 5000원은 1997년 IMF의 고통을 온몸으로 맞아냈던 아버지가 제 딸에게 건넨, 최대치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나는 공연히 마음이 숙연해져서 친정집에 전화를 드렸는데 차마 '그때 큰 돈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선뜻 말하기가 쑥쓰러워 농이나 던지고 전화를 끊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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