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아카(초1 딸)에게 여름방학 계획표를 짜보라고 했더니 계획인 듯 계획 아닌 것들을 적어냈다. 예컨대 이런 것들.
1.놀면서 소화시키기
2.집에 가기
3.잠을 푹 자기
계획하지 않아도 절로 되는 것들 아닌가, 피식 웃고 말았다가 이거야말로 수천만 노동자들의 위시 리스트 아닌가, 하고 탄복했다. 놀 시간이 없거나 노는 방법을 잊어버린 직장인들과 소화불량에 시달리는 직장인들과 야근 때문에 집에 못 가는 직장인들과 수면 부족 때문에 잠 한번 푹 자보는 게 소원인 직장인(육아 및 가사노동자인 전업주부 포함)의 얼굴들이떠올랐다.
그 얼굴들은 나였고 너였고 우리들이었다. 당연한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었을 때 당연한 것들을 요구해야만 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잠시 생각했다.그러나 그 세상이 제 아무리 견고하다 한들 언젠가는 사람들의 힘으로 무너뜨릴 수 있지 않을까, 당연한 것들이 마땅히 당연해지는 세상을 우리가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장면2
퇴근길에 백화점 빵집에 들렀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ㄹ자 모양으로 대기하는 사람들 행렬에 들어갔다. 드디어 내 차례. 가장 큰 케이크를 가리키며 당당하게 외쳤다. 이거 주세요. 하지만 50대로 보이는 여성 점원이 건넨 것은 가장 작은 케이크였다. 나는 저 이거 가장 큰 걸로 주세요, 거듭 요청했다. 그랬더니 아주머니가 하시는 말씀.
제가 말귀를 잘 못 알아들어서 죄송합니다.
그 문장에 화들짝 놀라, 아니라고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동안 얼마나 모진 말들이 아주머니의 마음에 박혔길래 겨우 그 정도의 일로 말귀라는 단어를 뱉으신 걸까. 나는 나의 가슴 언저리에 닿을 정도로 키가 작고 몸이 굽은 아주머니의 등을 내려다보며, 문득 그 등을 곧추세워드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겐 대체불가능하고 소중한 저 사람의 생에 그 어떤 흉한 말과 행동들이 더는 침투하지 않기를 바라다가, 나는 하마터면 아주머니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