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물'을 주고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좋아한다.
선물을 준다는 것.
그 대상이 누구이든지 '기대와 보답'의 성격이 있고, '실망과 서운함'을 예방해 보려는 방편이 된다.
물론 정말 '고마움과 그리움'에 벅차, 혹은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열망'으로 시도하는 경우도 많다.
상대의 기호와 취향을 헤아려 그 종류를 고르는 시종의 과정과, 액수에 대한 고민까지 생각하면 선물을 준다는 것은 아주 섬세하고 까다로운 '절차탁마'의 과정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상품권으로 많이 주게 된다.
선물을 준비한다는 것은 상대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고 돌아보게 하는 좋은 효과가 분명 있다.
선물을 받는다는 것.
그 누가 주는 선물이든지 일단 기분이 좋다.
선물을 받고서 '아 정말 기분 너무 더럽네'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북두칠성 별자리의 별이 몇 개를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일 수가 있겠다.
선물을 받으면 아무래도 선물을 준 사람 자체와 그 사람의 마음결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게 된다.
의심이 많은 나는 가끔 선물을 받으면 '저의'를 생각해 보려는 습성이 있지만, 선물 자체가 주는 '현현함'이 그 안 좋은 습관을 이내 삼켜버린다.
나는 마누라 빼고는 고마운 사람들한테 선물을 주는 것을 꽤 좋아한다.
대학 시절부터 아끼는 사람들한테 책선물 하는 것을 엄청 좋아했다.
제일 좋아하는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여기저기 100권 넘게 준 것 같다.
카카오톡에서 지인의 생일이 뜨면 '줄까 말까를 너무 고민'해서 두달 전쯤 아예 알림을 없앴을 정도이다.
그랬더니 얼마 전 아끼는 사무실 여직원의 생일을 지나쳐 아쉬웠지만 다시 알림을 켤 생각은 없다.
선물 경제가 주는 '어수선함과 기대, 실망의 굴레'에서 좀 벗어나 보기 위해서이다.
한참 선물을 날리던 시절에는 내 생일이 되면 선물함을 열어보고 '어? 이 사람은?'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물할 때의 내 마음이나 정성에 대한 순수한 조망보다 '선물의 회신 여부'에 대한 애꿎은 확인을 하게 되는 본말이 전도된 상황이 일어나곤 했다.
선물을 주고 나면 아무래도 응답을 기다리게 된다. 돌아오는 방식이 선물이든 행동의 변화이든 '작위, 부작위'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그래서 선물은 종국적으로는 서로를 비참하고 초라하고 공허하게 만들기 일쑤다.
사람들은 선물을 주고 나면 목적과 진심이 어떻든 '나 잘 했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대가 내 마음량 이상으로 만족했다고 쉽게 여기면 오산이다.
시기가, 방법이, 과정이, 종류가,태도가 다 변수가 되며, 무엇보다 선물을 준 상대가 누구냐가 결정적인 메가 변수가 된다.
선물은 잘 줘야 한다. 선물은 참 매혹적인 수단이지만, 자칫 위험한 '계륵'이 될 수가 있다.
경조사의 세계를 보자.
축의금과 조의금.
내가 세무서에서 구청 세무과로 옮긴지 얼마 안되었을 때 과 내 젊은 여직원의 결혼식이 있었다.
평소 참 착하다 여긴 이미지 좋은 직원의 결혼이라서, 평생 한 번 있을 그 날을 더딘 마음이더라도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에 '10만원'을 준비했다.
그 때도 내 마음의 경조사 금액 마지 노선은 '5'였다.
그런데 동행한 팀장이 나의 봉투 금액을 묻더니 놀란다.
"김 주임? 돈 많아? 나는 3만원 해. 근데 가서 밥은 왕창 먹을꺼야! 중요한 건 마음이야. 가서 술이나 좀 많이 마시며 축하 좀 제대로 해주자고~"
아무래도 구청(지방직)은 세무서(국가직) 보다 경조사 금액 층위가 한 단계 낮다.
월급의 차이는 없는데 아무래도 예전부터 내려온 문화의 차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인지 좀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세무서 시절 수준으로 경조사비를 낸다.
돈 쓰는 씀씀이나 마음 씀씀이도 더 궁색한 바가 분명하게 없지는 않다.
내 차로 같이 가는 내내 밥맛이 떨어져 결국 도착해서 우회하다가 그 양반과 다른 테이블에서 식사했다.
결혼식을 제대로 안 보고 식당으로 바로 향한건 피차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 팀장의 축하하는 마음이 더 높았거나 깊었을지 모르고 그런 걸 따지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아무래도 액수의 고저에서 오는 차이가 여러 생각을 교차시켰다. 그 팀장은 그 날 거나하게 잘도 취했다.
현물도 그러하지만 현금도 잘 줘야 한다.
중요한 건 진정성과 애틋함, 상대를 아끼는 마음일 것인데 그것이 형체가 되고 계량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순간 '비교의 비극'은 시작된다.
선물이 주는 몇 가지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더 적은 종류의 역기능 때문에 나는 '선물 경제'를 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고마움이 일렁이거나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카카오톡 선물하기'에 어느새 들어가 있는 버릇은 여전하다.
선물을 주는 것을 좋아한다고 썼지만 솔직히 나는 선물을 받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그래도, 그러나 선물은 참 좋은 것이다.
마누라가 어제 새 스카프를 펄럭이고 싶다고 말하긴 했다.
다시 선물한다 말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