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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떠난 후 알아 버린...

by 하니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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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침을 열었다.

기분이 좋았다.

수면의 질이 좋아 글머리가 잘 돌았다. 아침에 '1일 2포'도 무난히 마쳤다.

내가 96학번이라 '96' 숫자를 좋아하는데 96번 째 일기도 스멀스멀 잘 나왔다.

그녀와의 추억의 옷깃이 처음 날리던 시절의 글을 썼던 터라 오전 내내 기분이 살랑였다.


오후가 열렸다.

내 옆자리 순둥이 여직원한테 악성 민원인이 찾아왔다.

성실하고 착한 내 짝은 그 민원인과의 다섯 차례의 전화 응대 때 정확하고 분별 있는 답변을 차분한 친절함으로 마쳤을 수 밖에 없는 위인이다.

상담 테이블에서 그 여자 민원인의 목소리는 고공을 구석구석 찔렀다.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이었으나 객쩍은 '친절'을 지켜야 하는 수세의 4년차 공무원은 묵묵묵묵.

내가 나가서 국면 전환을 시도 하려하니

"미친 놈아! 너 담당이야? 아니면 꺼져! 왜 좀비처럼 오고 지랄이야?"

나는 눈을 위아래로 희번덕거렸고 욕 한 자락 입 안에서 맴돌리다 참고 나왔다.

1시간 넘게 생목으로 '비창'을 불러 제끼더니 여자 민원인은 떠났다.

그런 수위의 진상들은 떠남이 종결을 뜻하지 않는다. 내 옆직원에게 '민사소송'을 건다 협박하고 갔다.

걱정한다. 두려워한다. 통화 내용을 다시 들어볼 수 없는지 한참을 알아본다.

직원들이 돌아가며 다독여준다. 나 같으면 한 시간쯤 추스린다는 명목으로 밖으로 나갔다 왔을텐데 그 친구는 성실함으로 바로 착석해 민원 전화를 또 받는다.


저녁이 열렸다.

2년 전 동네에서 우연히 마주친 초등학교 친구 부부와의 부부 동반 저녁 식사.

딸래미는 동네 친구들과 숙제를 하러 간다고 예정을 바꾸었고 친구의 아들도 오락을 한다며 오지 않았다.

처음 만난 두 여자는 동갑에, 세 자매라는 공통점을 나눠가며 조금씩 친해졌다.

나랑 초등학교, 고등학교 때 동창인 순수와 선량치가 높았던 친구.

나랑 같은 단지에 함께 살았던 친구. 등하교길에 사양해도 내 가방을 계속 들어 주던 친구.

다른 애들이 나를 놀리면 나 대신 주먹 다짐을 해주던 친구.

다시 만나서 참 좋은 친구. 오랫동안 채워지지 않았던 빈자리를 채워준 것 같은 풍경화 같은 친구.

넷은 정치 성향도 맞았기에 즐거움과 걱정을 교차시키며 시간을 꽉 채워 보냈다.

중간에 딸래미가 와서 후식 냉면도 먹고 좀 이른 시간(9시 반)에 헤어졌다.


밤이 열렸다.

집에 와서 나는 습관처럼 블로그를 열어 답글들을 챙겼다.

어제 올린 미라클 모닝 글에 유시민과 그 가족 전체가 아주 사악한 집단이라는 오염된 긴 답글 하나가 온갖 링크가 범벅이 되어 올라와 있었다. 고민을 좀 했다.

신고? 차단? 삭제? 답글로 삭제 요청?

나는 세 번째를 택했다. 분통과 슬픔이 밀려왔다.

어제의 글은 어떠한 정치색도 들어가지 않은 '삶의 자세'에 대한 글이었고 그 글에서 샘솟은 나의 짧은 생각을 풀어 놓은 '무채색'의 글이었음이 분명하다.


전장이 아닌 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작은 차이만 있으면 상대를 악마화 시키는 '미움과 확증 편향의 시대'가 그 싱크홀을 넓혀 가고 있다.

선악의 경계가 해체 되었고 앞뒤 없는 적대적 사회 분위기가 열렸다. 문을 닫아야 한다.

과녁을 오조준한 섣부른 시선과 공격성을 거두어야 평화의 시절이 다시 올 것이고 그래야만 한다.


삶이라는 것은 상수와 변수의 대결이다.

축구장이 있고 축구공이 있는데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것은 잘 만들어진 축구장이 아니라 조그마한 축구공 하나일 것이다.

축구장을 만든 사람들이 조작한 껍데기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축구장 자체의 미혹에 넘어가면 안 된다.

아름다운 것은 작은 축구공이 굴러가는 방향의 변주와 그것을 향해 달려 어우러지는 너와 나의 드리블들이다. 달리다 보면 변수가 상수가 되고 상수가 변수가 되는 것이다. 공은 그래서 주로 동그랗다.

삶의 변수, 상수 이런 것들은 일시적 나눔에 불과한 것이고 지나고 보면 그 분별들이 결국 서로를 조금 더 동그랗게 사랑해 가기 위한 과정이 아니었을까? 아니었다면 그것이 더 좋지 아니한가?

부디 서로가 서로를 덜 미워하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며 그런 날이 오기를 두 손 모아본다.

아무튼 또 잠을 설쳤다.


새벽이 열렸다.

오늘 미라클 모닝 글을 쓰다가 이상우의 '바람에 옷깃이 날리듯' 노래가 떠올라 다섯 번 연속 들었고 가슴이 말랑해졌고 감성이 차올랐다. 다시 기분 좋은 새벽이 되었다.

'그녀를 만나는 곳 100M 전 ', '슬픈 그림 같은 사랑'


이 젖어듬의 젖어듬.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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