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대학 시절.
서울대 문리대 동숭동 뒷산 낙산 기슭에는 함부로 지어진 가옥들이 옹기종기 얼기설기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산비탈에 걸쳐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길로 이어진 주택들은 옆집의 밥짓는 소리, 밥 먹으며 떠드는 가족들의 웬만한 대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 두 살 밑의 숙명여대 다니는 여동생(둘째 고모), 다섯 살 밑의 덕성여고 배구선수 여동생(셋째 고모), 경동중학교 다니는 막내 남동생(막내 작은아빠)에 일하는 사람까지 다섯 식구가 방 둘을 얻어 자취 했다고 한다. 남매들이 아침이나 학교 다녀 온 저녁 무렵에는 어찌나 웃어댔던지 동네에서 웃음소리 많이 나기로 소문난 집이었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는 사람을 잘 웃긴다. 그냥 웃기는 것이 아니라 잔뜩 주눅 들어 있는 사람조차 금세 활기차게 하는 웃음을 만들어 낼 줄 아신다. 암울했던 군사독재 시절, 패배주의적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던 자리가 아버지의 유머와 해학으로 단박에 새로운 결의의 자리로 바뀐 일화가 적지 않다고 한다.
둘째 고모는 오빠(아버지)의 말 한 마디가 끝날 때마다 잘 웃기로 소문난 분이었다. 아버지 생전에 정말 진한 우정과 사랑을 나누셨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얼굴이 이뻐 남자들의 인기를 그야말로 휩쓸고 다니셨다 한다.
둘째 고모가 결혼하기 며칠 전 일이 하나 터졌다.
아버지보다 5년 일찍 결혼한 고모는 돈 쓰기를 좋아했는데 결혼식을 앞둔 고모는 온갖 씀씀이가 더 무럭했다고 한다.
그 무렵 아버지는 대학 졸업 후의 긴 실업으로 비탄에 깊이 빠져 있었는데 동생의 소비 습관이 평소에도 불편하던 차에, 밖에서 술 한 잔 걸치고 들어온 그 날 아버지의 발화점이 제대로 눌려버렸다. 고모의 고운 얼굴만 빼고 두들겨 팼고 결혼을 사흘 앞둔 새신부의 몸 여기저기에 멍이 들었다고 한다. 그 때도, 이후에도 고모는 아버지한테 화 한 번 안 냈다고 한다.
이 얘기를 아버지는 7남매가 모였을 때 술안주 거리로 가끔 올리셨고 둘째 고모는 그 때 마다 까르르 웃으셨다. 고모는 오빠를 참 좋아했다.
아버지가 다녔던 사학과 62학번은 학생 수가 열여덟 명이었는데 남학생이 열 넷, 여학생이 넷이었다고 한다. 그 중에 홍승재와 심재주, 아버지 셋이서 붙어 다녔다고 한다. 심재주는 당시 60년대초 유명했던 문리대 학교 <새세대> 신문 편집장이었고, 홍승재는 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진보적 이론가였다. 둘 다 대구 출신이었고 둘 다 찢어지게 가난했다고 한다. 아버지 집에 자주 들러 밥도 먹고 잠도 자고 돈도 빌려 갔다고 한다. 둘 다 4.19 직후 문리대 데모대 핵심 멤버로 데모를 기획하고 이끄는 그룹에 속해 있었다고 하며 아버지도 문리대 데모에는 빠지지 않고 참여했고 진보적인 서적들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해방 직후에 나온 누런 갱지에 인쇄된 100~200 페이지 안팎의 책들이었는데, 어떤 친구들은 그것을 모두 탐독해 줄줄 외워대기도 했다고 한다.
아버지 집에 자주 드나드는 또 한 팀은 광주일고 고등학교 동창들이어는데 서울 법대와 서울 문리대에 다니는 10여명의 친구들이었고 처음엔 한두 명이었는데 고교 동창생들은 물론이고 나중에 그들의 친구들까지 모이면 아버지는 개인적인 시간을 갖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친구들은 점심 때면 아예 도시락을 들고 아버지 집에 와서 밥을 먹었다고 한다.
대학에 늦게 들어간 아버지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친구들이 너무 많이 찾아오자 공부하기가 힘들었고 생각다 못 한 아버지가 묘책으로 방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벽에다 '이 방에 들어온 손님은 5분 안에 돌아가시오'라고 써붙여 놓았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내 생각에 고모들 중 가장 미모가 출중한 둘째 셋째 고모를 보러 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실제로 그 무리 중 한 명과 둘째 고모는 결혼을 하여 나의 부모와 달리 유명한 잉꼬 부부로 살고 계신다.
한번은 어떤 친구에게 집에 가서 펴보라며 '공부 좀 하려고 하니, 우리집에 놀러오지 마라'는 쪽지를 건네주었는데, 그 후 사이가 벌이지고 말았고 친구들이 화해를 시킨답시고 화해주를 마시게 되었다 한다. 그런저런 이유들이 결국 시간만 허비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대학 4년 동안 피부병에 시달렸다. 피부병이랬자 여드름의 정도가 심한 수준이었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몹시도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모든 여학생들이 당신에게만 눈길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셨고 얼굴과 목덜미에 난 여드름이 원수처럼 미웠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씻으러 들어가면 항상 한 시간 가까이 씻곤 하셨는데 엄마는 아버지가 외모 열등감이 심하고 당신의 검은 피부을 싫어하셔서 저렇게 열심히 매일 씻는거라고 말씀하셨다.
7남매 중 제일 인물이 쳐졌고 어린 시절부터 당신의 엄마(할머니)에게 그 외모(할머니를 가장 닮음) 때문에 수 차례 차별까지 당했으니 아버지의 그 한 시간은 참 구슬픈 한 시간이 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대학시절 기록이 이것으로 끝이 났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엄마도 내가 대학 시절 얘기를 물으면 '학보사에 다니느라 정신 없었다' 한 문장으로 끝이 나니 엄마 아빠의 대학 시절이 궁금한 나로서는 싱겁고 아쉬울 따름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못했지만 낙산에서 보낸 문리대 시절은 좋은 친구들과 다양한 교류를 할 수 있었던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아버지는 회상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