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의 그 많은 도시들 중에서 유일하게 'ㅇㅇ 정신'이라는 말이 붙는 도시.
빼앗긴 건 되찾을 수 있지만 내어준 건 되찾을 수가 없다.
“광주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1980년 5·18 광주 민중 항쟁에서 가두방송을 하던 당시 22세의 여성, 지금은 67세가 된 박영순 씨의 애절한 목소리.
5월 26일 밤부터 전남도청 앞에는 작은 확성기를 통해 이 목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5월 27일 새벽 1시 ‘상무충정작전’이 개시되었다.
서치라이트가 도청을 향해 비쳐지고 항복을 권유하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폭도들에게 경고한다. 너희들은 완전히 포위됐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작전 개시 1시간 반만에 교전이 끝이 났다.
수백, 수천에 달하는 광주 민중 항쟁의 사망자 수의 정확한 추산은 의미가 없다.
전두환은 '특정 지역' 군인들을 며칠 간 일부러 잠을 재우지 않은 채로 진압에 투입했다.
'북한의 지령을 받은 폭도들을 진압하라.'
나는 어린 시절(6~7세)부터 집에서 광주 민중 항쟁 당시의 피곤죽이 된 시민들의 사진들을 많이 접했다.
충격 그 자체였다. 그 당시 운동권 대학생들이 몰래 '광주 시민들의 참상' 비디오 테이프를 보고 구토를 많이 했다고 하는데 난 다행히 비디오 테이프는 보지 못했다. 비위가 약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사냥'
"대검으로 찔러"
"여자, 팬티만 입히고 마구 때리고 폭행"
"반드시 집까지 쫓아가 구타"
"도망가는 시위대에 칼을 던져"
"도망가는 사람들의 머리를 조준하여 사격"……
금남로에서.
계엄군들은 시민들이 돌을 던지고 덤벼도 일정거리까지 가까이 오기 전에는 꼼짝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총알같이 튀어나와, 달아나는 사람의 머리를 쇠뭉치 같은 곤봉으로 후려갈긴다.
맹수가 사냥거리를 낚아채듯이.
병원마다 머리 터진 사람이 즐비했다. 부상자의 대부분이 머리가 '함몰'되어 있었다고 한다.
계엄군의 살육은 결국 대규모 시민봉기를 불러일으켰다.
광주는 서울과 같은 대도시가 아니었다.
그 당시 인구가 70만명 정도. 한 다리 건너면 친구, 친척, 동문인 곳.
옆집 아들의 죽음이 바로 내 자식의 죽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는 곳.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계엄군은 금남로에 운집한 수만 명의 광주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를 했다.
이로 인해, 54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계엄군의 총탄을 피해 흩어진 시민들은 곳곳에서 시위를 이어갔고, 이를 해산시키기 위해 계엄군은 무장헬기까지 출격시켜 광주천변에까지 사격을 가했다.
광주 도청 옆 '전일 빌딩'에 박힌 245발의 총알들(헬기에서 쏨)의 탄흔은 외신에서 두고두고 군부 독재 정권의 '폭압적 살육성'의 상징으로 회자되었다고 하는데, 그 당시 국내에는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탄흔을 감사한 국과수에서는 “바닥에 내리꽃힌 형태의 탄 자국은 공중에서 쏘지 않고는 생길 수 없다”고 밝혔다.
우리 모두는 작년 12월 3일 덕에 민주주의 교과서의 한 표본이 될 수 있는 '역사'를 온 몸으로 관통했다.
우리 딸도 그 역사를 생생히 보았고, 정치 의식을 진일보시켰다.
민주주의 참교육자 '윤석열'에게 경의를 표한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그렇다. '1980년'이 '2025년'을 구했다.
광주 금남로 민주광장 앞에는 이 맘때 '보드를 타는 10대들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고 한다.
먼저 돌아가신 분들이 일상적이고 평화롭고 모든 게 제 자리에서 움직이는 그런 풍경을 보시면 '아 우리가 결국은 승리했구나'라고 생각하시지 않을까?
나는 인간의 마지막 감정의 보루가, 심장의 증거가 무엇인지 자주 생각해 보는데.
역시 1, 2위는 '양심'과 '염치'이다.
개인주의가 첨예화되고, 자기 연민 과잉의 시대가 된 요즘.
눈이 있으면, 배움이 있었다면, 목도가 있었다면, 역사가 '역사'라는 과목의 개념적 의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인간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알기' 이전이나, 모르더라도 그 나쁜 '이전'으로는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80년 광장과 도청을 지키던 시민군들에게 시민들은 목숨을 걸고 음식을 해오거나, 생필품을 앞다퉈 가지고 왔다고 한다. 심지어 계엄군에계도 음식을 나누어 줬다고 한다.
'계엄' 이전에 '일상'이, '군인' 이전에 '사람'이 있었다.
계절이 수 차례 덧대어졌고, 세월이 변했지만, 계급과 계층의 층위와 종류는 다각화 되었지만.
1980년의 '어린이'가 2025년의 '노인'이 되고, 1980년의 '편력'이 2025년의 '순수'가 되었지만.
결국 모든 시대의 교집합은 '인간'이고 '사랑'이고 '양심'이고 '염치'가 된다.
'수직'의 미학에서 '수평'의 미학으로, '선과 면'의 미학에서 '입체와 극소'의 미학으로 유행과 풍조가 변하고 있지만 시대를 관통하여 우리가 지키고 싶은 것들은.
결국 일상적이고 평화로운 것들이 제 자리에서 크게 움직이지 않는 풍경들의 유지'일 것이다.
큰 패배는 물론이고 작은 승리에도 우리는 사실 '관심'이 잘 없다.
그저 계속 '머무르거나 머금을 수 있는 삶'이면 되는 것이다.
두 번의 계엄을 통해 '일상'이 '정치'이고, '정치'가 '일상'임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결국 '깨어 있는 시민들의 단결된 힘'임을 다시 가슴에 깊이 박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