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많이 좋아한 박노해 시인의 시다.
'아직'에 절망할 때
'이미'를 보아
문제 속에 들어 있는 답안처럼
겨울 속에 들어찬 햇봄처럼
현실 속에 이미 와 있는 미래를
아직 오지 않은 좋은 세상에 절망할때
우리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삶들을 보아
아직 피지 않은 꽃을 보기 위해선
먼저 허리 굽혀 흙과 뿌리를 보살피듯
우리 곁의 이미를 품고 길러야 해
저 아득하고 머언 아직과 이미 사이를
하루하루 성실하게 몸으로 생활로
내가 먼저 좋은 세상을 살아내는
정말 닮고 싶은 좋은 사람
푸른 희망의 사람이어야 해
나는 어제 우는 딸을 달래며 11시 40분 쯤 잠이 들었다.
첫 새벽 시간은 3시 38분.
갈등했다. 보통 일어난다. 그런데 아이가 꼼지락거린다.
안아주었다. 잠들었나보다.
다시 깼다.
두번 째 새벽은 5시 35분!
주저하지 않았다.
벌떡!
어제 '미라클 주니' 방에서 글터지기 형님께 말한 '독서'와 미라클 모닝글 작성 '공언'이 생각났다.
책을 들었는데 여기서 우뚝, 저기서 멈칫. 안 되겠다. 제대로 짠짠하게 다시 봐야겠다.
내가 오늘 첫 번째 일어난 시간은 '아직'이고 두 번째 일어난 시간은 '이미'이다.
이것은 같은 나의 아직과 이미 사이.
내가 오늘 두 번째 일어난 시간은 누군가에게 '아직'이고 첫 번째 일어난 시간은 누군가에게는 '이미'이다.
이것은 다른 너와 나의 아직과 이미 사이.
너와 나의 구분과 분별은 의미가 없고, 척도와 관점, 입장과 자세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간이든 공간이든, 사물이든 사람이든, 재산이든 행복이든 각자가 생각하고, 기준하는, 입장하는, 바라보는, 받아들이는 바에 달려 있는 것이다.
파랑을 빨강이라 부를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지만 같은 파랑을 빨강보다는 시원한 색이라 좋다고, 빨강보다 차가운 느낌이라 아쉽다고 말하는 것은 각자의 '바에' 달려 있다.
우리는 자웅동체가 아니기에 서로 '사랑'하고 아메바가 아니기에 '투표'한다.
'사랑'은 점에서 선으로, 선에서 면으로 가는 과정인데 그것이 법적인 약속을 지나, 어느 정도 세월의 풍화를 겪고 나면 그 '면'이 깨져버리기 마련이다. 이 면을 깨트리는 것은 면이 아니다. 그냥 '점'이다.
아주 사소한 극소함에서 극대함이 나온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창대한 싸움이 된다.
미세한 타격이 국면을 무너트리고 너와 나라는 점을 잇닿게 한 마지막 선까지 끊어버리면 너와 나는 다시 점이 된다.
이 점과 선, 선과 면에 대한 생각은 다음에 다시 글로 써볼 일이 있을 것 같아 이 정도로.
아무튼 '사랑'이었는데 틀린 사랑이 되고, 입술 한 번 훔쳐 보려 더딘 새벽을 아쉬워했었는데 온 밤을 함께 해도 밋밋하고, 뒤척이다 살짝 스치우는 것에서 '어색함'을 느끼게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아직과 이미 사이이다.
우리는 19일 뒤에 '투표'를 한다.
뜨거운 겨울을 보낸 우리는 생각도 해본다. 그런 겨울이 있었던가? 봄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며 산책도 하고 커피도 마시다 보니 그나마 몇 개 남지 않았던 정치근이 소실되어 간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생각해 볼 일이다.
사전투표 때는 딸이 감기에 걸려서 병원에 가느라, 그 다음날에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고 중등부 교사까지 하고 오랜만에 엄마를 만나 늦은 점심을 먹고 낮잠까지 자고 오니 까무룩.
본투표 때는 긴 투표 시간에, 5년 만에 찾아와 더 귀한 어찌 보니 '휴일'에 늦은 아점을 먹고 바쁜 일상에 미뤄 두었던 '폭삭 속았수다'를 틀었더니 밤 11시. 잘 시간이 되었고, 나의 한 표 없는 개표가 진행된다.
사실 나는 소수의 친구들이 '정치' 얘기를 꺼내면 짜증이 난다.
그네들이 뭐라고, 어떤 누가 앉든 내 삶이 여전히 팍팍하고 고단한데, 지들이 무슨 상관이라고 아는 척 지껄임? 빨강이든 파랑이든 내가 보기엔 다 같은 별나라 회색인데.
헤이 니들 그 딴 잡소리 집어 치우고 소맥 한잔 기가 막히게 말아봐라.
나한텐 누가 수권 세력이 되든 전혀 상관 없고 '히야시 소맥 한잔'이 훨씬 의미 있고 가치가 드높다.
이렇게 살면, '억지로는 아니었던 우연한' 그 하루들이 더해지다보면 점점 더 정치꾼들이 지맘대로 한다. 그건 막연히 알겠다.
이럴 때 나는 아직과 이미 사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