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있고, 공간이 있다.
그 위나, 사이에 종이 한 장을 두면
새로운 마음이 펼쳐지고 삶의 경계가 그어진다.
제도 샤프가 아닌, 연필이면 더 좋다.
사각사각.
국민학교 시절,
나무 책상 위에서 종이 울리기 전.
터질 듯한 눈과 손으로,
종이 위에 벼락 숙제를
끄적일 때의 소리와 감촉.
그리운 즐거움.
그 한 장들이 모여,
그 절실함들이 모여,
그 풋풋함들이 모여,
시간이 된다.
삶이 된다.
책이 된다.
그리고 지금,
시절과 세월을 꾸준히, 섬세하게 머금어 온
작가들의 그것을 클릭 한 번이면
내 손과, 마음에 반나절이면 닿게 할 수 있다.
이 얼마나 무엄하게 행복한 반칙의 시대인가?
손가락 한 번 튕기고 나서,
수다 좀 떨고,
과식에 졸다가,
누구보다 빨리 계단을 내려가,
비밀번호 누르는 시간도 아끼려
스마트 키로 공동 현관문을 열고 올라가면,
마음 바구니가 와 있다.
손에 잡히는 두꺼움이 좋다.
한 장 넘길 때마다 스며 오는 종이 냄새가 좋다.
화장을 마쳐 부드럽게 미끄러져 넘어가는 감촉이 좋다.
좋은 문장 위를 더듬을 때 만져지는 주름이 좋다.
다시 하루.
쏜살 같은 퇴근.
어제 보던 곳이 목마르다.
꺼내고, 펴고, 넘긴다.
아! 이 문장은 안 되겠다.
연필로는 부족하다.
충심을 다하는 의미로 파아란 볼펜으로 긋는다.
지구 색연필의 가장 왼쪽에 누워 있던 보라색을 꺼내
단어 하나를 둥글게 가둔다.
나는 그 물성이 좋다.
그 침침한 아날로그가 좋다.
가끔 집어들었다는 이유만으로 균형이 무너지는 느낌이 좋다.
내가 종이책을 좋아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