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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성장기 4.(-아기 돼지 삼형제와 엄마의 식칼-)

by 하니오웰


나의 엄마는 대학 시절 교우 관계가 넓지 않았다.

딱 두 분 얘기만 들었다.

첫 번째 이모는 정림이 이모.

우리 엄마랑 아빠를 결혼에 이르게 하신 분으로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정이 많으시다. 체구는 작은데 목소리는 아주 높고 카랑카랑 하다.

아버지가 중앙정보부에 한참 쫓겨 다닐 때 이모도 남산으로 잡혀들어 갔다. 아버지와 엄마의 가족들과 친구들은 거의 모두 다 잡혀들어가 갖은 수모를 겪으셨다.(상술했듯이 핏덩어리 자식들한테도 추궁했을 정도이니...)

"김○○ 어디갔어? 자빠트리기 전에 불어. 썅년아" 요원 두 명이 실실 쪼개며 물었는데.

이모는 담배 하나 달라하고 훗날 '원초적 본능의 샤론 스톤'과 거의 일치하는 모습으로 다리를 바꿔 꼬으며 한 놈에게 연기를 내뿜었다.

이모는 "몰라 이 개새끼야. 그 전에 막걸리나 주던지."라고 하셨고 기세에 탄복한건지, 부질 없다고 여겼던지 바로 풀려나셨다고 한다.

이모는 40 여년 전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다.

한국에 계셨더라면 같이 흥취를 더하며 내 작은 마음 종지 그릇을 꽤 키워낼 수 있었을텐데.


두 번째 이모는 상희 이모.

차분하고 조용한 그냥 참 착한 분이셨고 남편은 의사였다. 세 딸의 엄마. 딸들도 내 또래였는데 오래전 기억이지만 다들 이뻐서 내 마음이 뭉게뭉게 했었다.

그 착한 이모는 40 여 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남편의 자유함에 오래도록 마음 고생 하셨다고 한다.

엄마는 유이하게 가장 친한 친구들을 조금 다른 형태로 차례로 떠나 보내셨고 두고두고 그리워 하셨다.

상희 이모 가족들과는 이모가 돌아가신 후 일절 연락을 끊어 버리셨다.


1981년.

나는 다섯 살 때까지 걷지 못 했다고 하니 아마 '엉금의 시절'이었을 것이다.

엄마를 따라 상희 이모네 집으로 놀러간 날.

이모의 남편이 아직 자리를 못 잡았을 시절이기도 하고 다른 이유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금호동 달동네 근처였고 집이 좁아서 많이 북적거렸던 기억이 난다.

나는 매우 들떠서 여기저기 대차게 기어 다녔을 테고 집에 올 때는 퍼져 버렸을 것이다.


그날 밤 11시도 훌쩍 넘은 시간. 우리 집 바닥에 나는 누워 있다.


"너 도둑질 또 할거야? 다시는 안 할거야?"


엄마는 식칼을 들고 힘껏 내 목을 눌렀고 나는 눈물 범벅이 된 채 버둥거렸다.

내가 연루된 관련품은 '아기 돼지 삼형제' 동화책 한 권 이었다.


문득 스치는 억울함은 '내가 그 책을 어디에, 어떻게 몰래 챙겨 기어 와서 엄마 가방에 재빨리 넣을 수 있었을까?' 이다. 분명 내가 기어 다녔을 시절인 것 같은데 '내 이동 방법' 부분 기억이 전혀 나지가 않는다.

확실한 건 나는당시에도 '한 때 축구 선수가 꿈이었던 발이 빠른 형'이 한 명 있었고 형은 나보다 어릴 때부터 책을 참 좋아했다.

아무튼 나는 남산 대공분실에서나 당할 수준의 고문을 당했고 그 날부터 나의 긴 '불면증'은 시작되었다.


2012년.

지금의 마늘과 연애를 시작하고 몇 달 뒤 엄마랑 여자친구는 응암동 '송도횟집'에서 첫 대면을 했다.

엄마는 여자 친구라고는 데려온 적 없는 나의 옆자리에 젊은 처자가 앉아 있는 것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스끼다시가 깔리자마자 소주잔은 빨리 돌았다. 모듬 숙성회가 나오고 회동 중반부. 센스 있는 여친의 기습 질문은 '1981년 칼부림 사건'에 가닿았고 엄마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취중 농담이었을까? 십 몇 년만에 연애라는 것을 해보는 아들을 위한 깊은 헤아림의 포석이었을까?

후자일 리는 없다. 그냥 술이 된거다.

2022년.

결혼 10년차를 맞이한 마늘의 질문은 '1981년 밤'으로 다시 향했고 엄마는 즉답하셨다.

"그건 내가 정말 잘한 일이었다. 그 이후로 이 놈의 도둑질이 없어졌다."

나는 1985년 엄마가 열었던 '석이네 집'(양품점)에서 플라스틱 의자에 발 앞꿈치를 힘겹게 들고 팔을 쭉 뻗어 허우적거리며 엄마가 숨겨 놓은 '거스름 돈통'에서 동전을 몰래 끄집어 내어 가게 옆 작은 오락실에 가서 오락을 참 많이 했다.


다시 바닥에 눕혀진 기억은 없는 걸로 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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