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

by 하니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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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기회가 찾아왔다.

그 여자애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살포시 의자를 빼고 앉았다.

평소 같으면 괜히 다리를 흔들거나, 여기저기 북북 긁적이며 산만을 틔웠을 텐데, 그날은 달랐다.

숨을 고르고, 손끝까지 다잡으며 내 잔망함을 꾹꾹 눌렀다.


옆눈으로 보니, 행정학, 행정법 교재가 쌓여 있었다.

행정직 9급을 준비하는 친구였다.

나는 오전 시간에 제일 하기 싫은 회계학, 세법 과목을 붙잡곤 했었는데, 그 날은 괜히 행정직, 세무직 공통 과목인 국어, 영어, 국사만 돌렸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두 시간씩 듣던 동영상 강의도 제꼈다.


흐트러질 수 없었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오로지 집중으로 밀어붙였다.

신기했다.

불이 붙었다.

그날 '몰입'이 주는 즐거움을 처음으로 온전히 맛보았다.


그래서였을까?

그 다음 날은, 그녀가 내 옆에 와 앉았다.

날들은 차곡차곡 쌓여 갔다.

어느새 우리 둘의 고정석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신기했다.

아무 말 없이 각자의 싸움을 이어가며 묘한 시너지 속에서 시간을 태웠다.

서로의 땀과 침묵이 부딪히며, 더 멀리 나아가게 하는 힘이 분명 있었다.


무언가 경이로웠고, 신이 났다.

나의 목적은 결국 '합격'임을 잊지 않으며, 서투른 짓은 하지 않았다.

날마다 나의 왼 발과 옆 발을 엇갈리게 하며, 힘차게 새벽을 열었다..


책상 위로 쏟아지는 빛을 타고, 눈과 펜을 바삐 움직이다 보면,

아주 가끔 초고도의 집중 상태에 이르고, 시공간에 묘한 파동이 흐른다.

공기는 활시위처럼 팽팽히 당겨지고, 숨결 소리만 돋는 적요한 순간이 온다.

나는 그 언저리 어디쯤에서, 네 달을 버텼다.


네 해 뒤, 7급 시험을 준비할 때는 그런 순간이 다시 오지 않았다.

그 때는 회계사 준비를 하는 국민학교 친구를 만나, 산만하게 공부했다.


절뚝거리며 매일 엄마와 구내식당에 등장하는 나는 명물이었다.

식당 아줌마는 늘 밥과 반찬을 더 얹어주었다.

오기와 독기를 담아 공부했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간절하게 '삶을 단순화'시키고 집중했던 시절이었다.


결과는 합격.

소식을 들은 날, 엄마는 끝내 눈물을 보이셨다.

밥벌이를 못 하고 평생 저등 룸펜, 밥버러지 신세로 남을 것으로 걱정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2004년 9월, 용인시청 수지출장소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집이 서울 은평구 갈현동이었는데, 수지까지 지하철과 버스를 두 번 갈아타는 두시간 넘는 출근길이었다.

패배주의와 무기력, 이유 없는 증오심에 휩싸여 20대를 관통하던 내가 그 긴 출근 길을 고단해 하지 않고 괜스레 어깨를 세우고 뻣뻣하게 다녔던 앳된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덧 : 그 친구도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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