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 6일부터 출근하라는 용인시청 인사과의 연락을 받았다.
첫 출근용 양복이 필요했다
엄마와 함께 신세계 백화점으로 향했다.
로가디스, 쓰리버튼.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한 사이즈 큰 걸로 해라.
살이 찔 수도 있고, 옷은 좀 커야 한다.”
꼴인즉, 텅 빈 옷걸이에 널린 흐느적 문어 같았다.
소매 끝은 손등을 덮었고,
바지통은 너무 넓어 허수아비 하나쯤 숨을 수 있을 듯했다.
미묘한 수치와 설렘을 담은 수지 첫 출근길,
시보의 시작이었다.
부자 동네였던 수지출장소는 풍덕천동에 있었다.
서현 역에 내려 버스를 탔다.
건물이 최신식이었다.
출근 첫 날 여사님이 말했다.
"출근할 때 정문으로 오지 말고, 후문으로 돌아 들어와요, 부탁 좀 해요"
후문은 건물을 한 바퀴 돌아야 나오는 끝자락에 있었다.
며칠 뒤, 동기들한테 이 얘기를 했더니 나만 들은 지청구였다.
헛헛했지만, 질문은 삼갔다.
바짝 비루하던 시절이었다.
발령 동기 몇 명이 기억난다.
수서에 살던, 새하얀 얼굴의 행정직 여자애.
성격이 느긋하고, 자기 리듬으로 세상을 사는 아이였다.
꽃꽃이와 성시경을 좋아했다.
퇴근길에 지하철역까지 종종 같이 걸어갔다.
입담은 좋았으나 믿음이 가지 않던, 한살 위 ‘입벌구’ 형
커피 자판기 앞에서 늘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끝은 누군가의 험담이었다.
같은 세무직이었고 말수가 참 많았다.
공수표 남발이 특기였다.
동기들끼리 '술 한 잔 하자'는 말을 먼저 꺼내놓곤, 정작 날을 맞추면 '선약이 있다'며 사라졌다.
나중에 세무서로 함께 옮겼지만, 그 형 번호를 다시 누른 적은 없다.
서천에서 올라온 순한 형.
그땐 응시 나이제한이 있어, 막차로 들어온 형이었다.
정이 많았다.
아침마다 본인은 전날 마시다 남은 커피를 다시 데워 마시면서도
누가 출근할 때마다 “커피 한 잔 타드려유?” 하며 의자를 빼줬다.
착한 사람이었다.
고향 친구 결혼식에 다녀 오는 길에, 우리 몫까지 챙겨 온 미숫가루를 돌렸다.
나는 주민세 담당이었다.
퇴근 시간 이후에야 수시분 고지서를 뽑을 수 있었다.
단 한 대 뿐인 고지서 출력 프린터가 근무 시간 중 멈출 경우,
민원인들이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굳이 그 불안 때문에 굳이 야근까지 하며 뽑아야 한다고?
박봉인 공무원들에게 야근 수당이 목숨줄인 것을,
목숨줄을 지키는데 명분이 필요한 것을 전혀 헤아릴 수 없던 시절이었다.
커피광으로 유명했던 안 주임님은 마음이 따뜻했다.
멀리서 출퇴근하느라 지쳐 있던 나를 짠하게 봤는지,
매일 20분씩 구석 자리로 불러
지방세 전반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 주셨다.
중앙대 법대를 나와 사법시험을 준비하다가 늦게 들어온 분이었다.
근무 시간에도 수험용 법전을 쌓아두고 보곤 했다.
“내년 시험까지만 도전해 볼 생각이야.”
두 달쯤 지나자 몸이 버티지 못했다.
노량진 고시원 시절 기억이 너무 싫어서 출퇴근을 고집했지만,
결국 고시원을 잡았다.
퇴근 후
편의점을 전전했고,
외로움은 라면 국물로 달랬다.
불야성의 수지는 반짝였지만, 나는 희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