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쓰지 않아도 되는 밤이었다.(말사회 천북 여행)

by 하니오웰
ChatGPT Image 2025년 12월 24일 오후 01_34_20.png



며칠 너무 바빠 즐거웠던 여행의 기록을 제때 남기지 못했다.

인생에 단 한 번의 풋풋한 시절을 꼽으라면 단연 대학교 때다.

그 숱함 속, 가장 뜨겁게 그리운 기억은, 다 '강다리'에 몰려 있다.

알알이 순수했고, 착했고, 따뜻했다.

몇 달 전부터 이 여행을 기다려온 이유였다.

내 대학 시절의 시종은 '강다리'였다.

학생회관 3층 코너,

'그림누리'와 '기독교 생활연구회' 사이에 있던 동아리방.

난 빨간 뚜껑과 함께 늘 거기에 헝클어져 있었다.

짧게 비상했고, 길게 고꾸라졌다.

'- 우리말 사랑모임 - , 삶과 말 그리고 강다리'

이름이 길기도 참 길었다.

설레고 심심하던,

정답게 사랑하고 싶지만 방법을 몰라 외롭던 젊음들이,

청춘의 시절 값을 톡톡히 치르던 곳이었다.

사회과학 동아리였지만,

운동권의 폐문기라,

그렇게 엄중하지 않으면서도, 거친 낭만의 기세가 남아 있었다.

술맛을 다룰 줄 몰랐고, 안주를 고를 형편도 못되었다.

그냥 함께라서 함께였다.

유독 96학번과 97학번이 끈끈했다.

'말사회'라는 이름으로 따로 모였다.

78년생이 말띠, 77년생이 뱀띠라서 그 이름이 되었다.

서로의 역사를 썼다가 지우고,

다시 쓰고 물리고 놓아주느라 바빴다.

주축은 환경공학과였고,

전자전기공학과, 정밀기계공학과, 환경원예학과, 전산통계학과,

생명공학과, 행정학과가 모여들었다.

졸업을 하고도 꾸준히 만났다.

나는 96학번이었는데, 우리 동기들의 골밀도는 이런저런 이유로 서서히 허물어져 갔다.

97학번은 단단했다.

영동군에 자리 잡은 97학번 부부를 주축으로,

30여 년에 가까운 시간을 부지런히 아끼며 서로를 든든하게 지켜주었다.

알았고, 부러웠지만 함부로 두드릴 수 없었다.

숫자는 한 뼘 달랐지만, 그 차이는 분명했다.

2년 반 전, 천북에 놀러 간다며 동행 제의를 받았다.

자기들끼리는 매년 그곳에서 모여왔다고 했다.

불러준 동생들이 그저 고마웠다.

출발 전,

대학교 첫 엠티 때의 그 줏대 없던 설렘을 잠시 되찾았다.

그때는 하니도 데려갔다.

천북은 '굴단지'로 유명했다.

이번에 나를 다시 천북에 초대해 주었다.

홍성 터미널에서 한 동생을 미리 만나 장을 보고, 천북으로 내달렸다.

먼저 모인 무리끼리 바지락칼국수를 점심으로 먹고 숙소로 향했다.

겨울의 한복판, 굴단지라 인파가 엄청났다.

숙소에서 굴단지까지 거리가 멀어 나는 차를 끌고 갔다.

굴찜 앞에서 잔이 돌고 또 돌았다.

한 놈이 카발란 위스키를 가져왔다.

1차에 차를 가지고 간 나를 배려해,

식당에서 콜키지를 하지 않고 숙소로 돌아와 위스키를 깠다.

달큰한 향과 부드러운 뒷맛이 일품이었다.

오랜만이라, 대학 시절의 흔적(존댓말)을 유지하는 놈이 하나 있었다.

그 존댓말은 오래가지 않았다.

우리는 '가는 데 순서 없다'를 외치며 금세 뭉근해졌다.

각자의 피부는 고집을 견디느라 쳐졌고,

안광의 총기는 세월을 담느라 흐려졌지만,

이기려는 말보다, 지켜내는 침묵도 나쁠 것 없음을.

망각과 단념이 주는 맛도 제법 씹을 만함을.

우리는 각자의 눌린 어깨에 쌓인 연륜만큼 깨닫고 있었다.

애쓰지 않아도 되는 밤이었다.

새벽까지 깊숙이 취했지만, 아침이 상쾌했다.

짬뽕으로 다 같이 속을 풀었다.

나는 조금 일찍 일어섰다.

밤새 열린 가슴에 딸이 보고 싶었고,

그 풍진 나의 대학 시절을 견뎌준 엄마도 보고 싶었다.

딸은 교회에 갔다가 밤늦게 와서 보지 못했고,

엄마는 전화를 끝내 받지 않았지만.

여운이 오래 남겠다.

귀한 동생들, 고맙다.

다음엔 내가 카발란 하나 업어갈게.

작가의 이전글어느 시절이나 유행은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