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일르시시스트란,
‘일’과 ‘나르시시스트’의 교배어다.
달성과 지표로 결핍을 누르며 타인을 재단하는 인간 유형이다.
존재의 근거를 내면이나 과정이 아니라 표면과 결과물에 둔다.
그러나 본질은 '일'이 아니다. 텅 빈 자기애의 공백이다.
자기 몫의 유닛일 때는 유능으로 읽힌다.
그러나 타인을 통솔하는 자리에 오르는 순간, 결핍을 권력으로 오인하고 직함을 방패로, 결재권을 칼날로 벼린다.
폭압은 원칙의 가면을 쓰고 있으나 실은 자존 결여의 뒤틀린 방어일 뿐이다.
서식 환경
일르시시스트는 위계와 구조 속에서야 호흡의 평균을 찾는다.
성과 지표, 평가 체계, 순위표, 마감. 숫자가 윤리로 치환되는 공간에서 비로소 안심한다.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을 신뢰한다. 관계보다 보고서를 선호한다.
정과 상호성의 증식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한다.
정서 구조
이들의 정서는 조건과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서 시작하지 않는다.
완료, 승인, 통과. 객관적 확인과 인정의 도상 위에서만 맥박이 뛴다.
성과가 멈추면 정체감도 멈춘다. 공백은 곧 무능으로 번역된다.
일이 멎으면 불안이 치민다.
대체할 일과 시비거리를 찾느라 텅 빈 동공을 시뻘겋게 태운다.
감정과 교감의 씨앗을 응시하지 못한 채 덮어버린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맨 얼굴과 맨 마음이 드러날까 오금이 저린다.
기저 자세
개구리도 아닌 것이, 뛰지도 못할 것이,
불안만 깊어 도약의 자세로 웅크려 산다.
관계 양식
일르시는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에 살핌이 없다.
'어디에 쓸 수 있는가?'에 관심이 있다.
서사의 맥락, 정서의 결은 중요하지 않다. 기여도와 효능성이 판단 기준이다.
‘내 사람’과 ‘소모 가능한 사람’으로 분류한다.
그 분류는 객관을 가장한 이해타산의 즉각적 계산이다.
공정을 말하지만 자기중심적이다.
존중을 말하지만 복종을 기대한다.
인정을 갈망하지만 교감을 피한다.
존재 방식
일르시는 내려앉지 않는다.
배석할 뿐이다.
성과는 자존의 증명서다.
멈춤은 무가치의 징후다.
개인 업무에서는 탁월하다. 그러나 공통 업무나 연대 책임이 요구되는 자리에서는 슬며시 물러난다.
협업의 언어를 쓰지만 끝없이 계산기를 두드린다.
등식은 하나다.
'내 몫이 얼마나 선명해지는가.'
폐해
일르시는 소리 없이, 그러나 확실하게 번진다.
성과는 오르지만 조직은 멍들어 간다. 개인주의가 팽배한다.
'왜 함께인가?'가 사라지고 '값과 몫'만 남는다.
관심과 이해는 소멸한다.
소통은 형식이 되고, 피드백은 압박이 된다.
실수는 낙인이 되고, 침묵이 생존 전략이 된다.
동료를 소모와 대체의 자원으로 환원한다.
남는 것은 효율의 외피를 두른 불안이다.
왜곡된 성과와 구겨진 사람만 잔존한다.
언어 습성
일르시시스트의 언어는 늘 객관의 가면을 쓴다.
'객관적으로', '원칙적으로', '데이터상' 같은 말로 판단을 중화하는 듯 보이지만, 감정을 배제하고 통제권을 선점하려는 과정이다.
성과 앞에서는 '제가'라 말하고, 문제 앞에서는 '우리'라 부른다.
'그래서 결론은?', '지금 이게 무슨 도움이 되죠?'로 의미를 압축한다.
일르시는 사적으로는 날을 세우지 않는다. 대신 공식적인 자리를 택한다.
위계를 배경으로 일부러 목소리를 높인다.
'이건 기본 아닙니까?', '상식적으로 이 정도는 준비했어야죠.', '다들 보고 있습니다.'
무안은 개인을 향하지만, 형식은 조직을 빌린다.
목적은 훈계다.
서열을 가시화해 권력의 체온을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