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징역살이>
계수님께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이성적으로 옳게 파악되지 못하고 말초감각에 의하여 그릇되게 파악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증오의 감정과 대상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혐오에 있습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운 사람을 향하여 키우는 '부당한 증오'는 비단 여름 잠자리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없이 사는 사람들의 생활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이를 두고 성급한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의 도덕성 문제로 받아들여 그 인성을 탓하려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 내일 온다온다 하던 비 한줄금 내리고 나면 노염도 더는 버티지 못할 줄 알고 있으며, 머지않아 조석의 추량은 우리끼리 서로 키워왔던 불행한 증오를 서서히 거두어가고, 그 상처의 자리에서 이웃들의 '따뜻한 가슴'을 깨닫게 해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추수처럼 정갈하고 냉철한 인식을 일깨워줄 것임을 또한 알고 있습니다.
1985. 8. 28
자기의 가장 가까운 사람을 부단히 미워하는 감정과 미움받는 감정 중 어느 것이 더 참담한 것인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미움을 받는 경우.
감정의 발화점이 내가 아니기에 그 시위의 방향을 돌리거나 그 겨눔의 뿌리를 발본하여 뽑아 버리기는 쉽지 않다.
그 감정의 시발점과 원인이 본인에게 있을 때는 나의 개전의 정과 단수로 해법을 잡아낼 수 있겠지만 그 출발점이 상대의 피아 분별 없는 습관적 증오심이나 질투찬 이유 없는 뒤틀림일 경우에는 묘수를 찾기 쉽지 않다.
낙엽의 쌓임과 계절의 수양에 그 몫을 넘겨 주고 마음의 고요와 덕을 높이는데 주안점을 두면 될 것이다.
미워하는 경우.
감정의 발화점은 나이기에 감정의 이면에 들어 있는 실제 사건들이 발생하게 된 연유나 상대 호흡의 본래 목적을 엄정하게 간추려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증오는 있는 모순을 은폐하거나 꾸며주기보다 사건과 사실을 있는 그대로 돋아 올려 객관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에 좋은 기회로 삼으면 된다.
나의 체취 때문은 아니었는지, 나의 겸손하지 못 했던 간과적 언행에서 초래된 것은 아니었는지 살피면 된다.
관계라는 것은 항상 상호 발생적인 것이며 각자의 실존은 총체적이고 중층적인 역사를 함축하고 있기에 충돌시 크고 작은 파편들이 튀어 나올 수 밖에 없고 그 파편들의 모양은 시간과 공간의 흐름 속에 변이 되기에 엔트로피를 제로로 환원 시기는 것은 태초부터 불가능하다.
내가 신영복 선생님을 처음 접한 것은 22살 때였다.
엄마 방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오랫동안 꽂혀 있었는데 읽지 않았었다.
뭐라 그럴까? 망둥이처럼 날뛰고 다니던 그 시절 '감옥', '사색' 등의 절제어는 나의 표준어는 아니었다.
학교에서 1년 유급을 당하고 찌그러진 생활을 하던 즈음. 그 책을 열어보게 되었다.
이 책은 신영복 선생님께서 1968년 날조된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20년간 수감 생활을 하며 가족들에게 담담히 보낸 편지의 형식이다.
한 달에 한 번만 편지를 써보낼 수 있는 상황. 머리 속에서 오래 눌러 다진 생각들을 묵묵히 옮겨 낸 응결의 글들이다.
사람과 삶에 대한 따뜻한 관찰과 깊은 사유를 통한 사색의 깨달음들을 3인칭 관찰자의 겸손한 시점을 유지하여 풀어 냈으며, 감정이입이 덜어져 있는 정갈하고 시린 절제미를 갖추고 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것들을 길어올린 그 글들 어디에도 미움과 혐오의 흔적은 없다.
독자는 가족이었는데 이 사색들은 시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이 되었다.
온통 회색 빛에 메마르고 증오의 칼날 소리만 들릴 것 같은 감옥이지만 신영복 선생님이 들려주는 감옥살이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사람이 숨 쉬고 있는 곳.
한 떨기 키 작은 꽃이 피어나는 곳.
작은 창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드나드는 곳.
선생님은 집합으로서의 '인간' 보다 고유로서의 '사람'을 견고하게 따뜻한 시선으로 일관되게 조명하셨다.
내 삶은 신영복을 읽기 전과 후로 나뉜다.
아끼는 주변인들에개 책 선물 하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이 책을 여기 저기에 50권 넘게 선물해 준 것 같다.
20 대....나의 삼각형은 신영복, 기형도, 전혜린이었다.
엄마는 내가 전혜린의 글을 보는 것을 참 싫어하셨는데 신영복 선생님의 글을 보는 것에는 말씀을 더하지 않으셨다.
사람이기에 '인간' 때문에 어수선한 요즘 내가 다시 들어 보는 책.
다시 '사람'을 길어올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