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조
김새론이 떠났다.
나는 '아저씨'라는 영화에서 처음 봤다.
묘하게 가라 앉은 눈빛이 참 기억에 남았다.
사람은 태어자나마자 죽어간다고 하는데.
모든 출생이 긴 기다림과 많은 축복 속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비록 조금 숨겨야 하는 출생일지라도 누군가에게 반드시 오랜 장고의 시간을 거듭시키는 것이 '생명'이라는 것의 힘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죽음을 '개인적인 죽음'과 '사회적인 죽음'으로 나눠 볼 수 있겠다.
죽음의 원인에 대한 얘기인데 개인적인 죽음은 질병이나 우발적인 사건에 의한 죽음이다.
나의 경우 자살 시도를 몇 번 한 적이 있는데.
중 3 때의 수면제 복용, 고 3 때의 샤워실 호스, 30대 초반의 넥타이 쇼 정도가 있다.
중 3 때는 수면제 몇십 알을 먹고 일어나 어지러워했고 빙빙 도는 느낌 속에 계속 물을 찾았다.
집에 엄마도 형도 있었는데 아무도 그 날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 것을 보면 들키지 않은 것 같다.
고 2 때는 싸움이 벌어지자 나의 장애를 당겨와 공격하여 모멸감을 준 같은 반 친구 때문에 짜증나서 샤워실 호스로 목을 두르고 양 손으로 당긴 적이 있는데 역시 해프닝이었다. 속아지였기 때문이다.
30대 초반에는 엄마의 잔소리 폭격에 대한 울분과 시작되지 못 하는 연애 때문에 전격적으로 넥타이를 문틈에 끼우고 의자 위에 올라가 의자를 밀어 본 적이 있는데 바로 옆이 같은 높이의 침대여서 의자를 밀자마자 침대를 딛고 사뿐히 내려왔다.
상술한 세 경우에서 보이는 것은 죽음이 아닌 '생의 의지'이다.
수면제는 몇십 알이 아니었고, 호스로 두른 목의 찰과가 짜증 났고, 의자는 침대에 밀착시켰다.
그러나 그 유인들은 모두 '사회적인' 시선과 암묵적인 질타에서 오는 박탈감과 외로움 때문이었음은 부인할 수가 없다.
내가 좀 더 속절 없이 시린 슬픔과 처절한 쓸쓸함 속에 떨어졌다면 사회적인 죽음은 완성되었을 것이다.
나는 고민하다가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새벽에 어디를 다녀오는 길에 차에서 '민물 장어의 꿈'이 흘러 나왔고 마음이 무겁게 짓눌리기 시작하며 '김새론'이 떠올랐다.
끊임 없이 스스로를 깎고 잘라 작아지다가 짧은 여행을 끝냈을 것이다.
음주 운전과 사건 이후 미숙하고 조급한 언행들 때문에 대중의 공분을 또 샀지만.
'죽음' 앞에 더 이상의 피고 놀음은 없다.
우리는 사무실이나 학교에서 단 한 명과의 갈등으로 인한 감정의 시소 게임에 하루를 망쳐 버릴 때가 많다.
갈등이나 투쟁 상황을 즐기는 사람이 일부 있을 수 있겠으나 인간은 보통 좀 더 안정되고 평온한 심신 상태의 유지를 더 좋아한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은 1대 다의 상황에 처할 수 밖에 없는 직업이다.
1대 다라는 거.
나를 사진으로 보기만 해도 좋아 미치는 사람 열 명과 점심을 먹는다. 그런데 한 마디씩 말을 건다. 그것도 칭송의 단어들로 나의 귀를 호강시켜 준다. 웃음으로 때우기도 했지만 일일이 대꾸해주느라 힘들었지만, 혹자는 내 대답을 듣지 못 해 풀이 죽어 보였지만 나는 오늘 점심 식사 내내 기분이 참 좋았다.
그. 런. 데
저녁에 또 열 명이 온다고 한다. 심지어 그 중에는 내 이상형의 남자도 있어서 기대가 된다. 또 나를 치켜준다. 그마저 말이다. 입에 미세한 경련이 오기 시작한다. 그래도 기분 좋게 잘 마치고 즐거운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다. 심신이 피곤해 이내 잠이 들었다.
그. 런. 데.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계속 된다. 심지어 사람이 늘었다. 누군가는 음식은 맛있는데 식탁이 작다고 투덜거린다. 가까이서 보니 화면 만큼은 아니라고 괜히 시비를 거는 사람도 있다. 홧김에 술 한잔 했다. 같이 잔을 부딪힌 건너편 사람이 저기 저 쪽에 있던 시기심과 질투심을 끌어다 보여준다. 목넘김이 더해지니 점점 가감이 없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나를 예뻐해 주지만 많아진 사람 덕에 욕도 많이 먹었다.
그.리.고.
자리에 누웠다. 나는 혼자다. 일련의 며칠 동안 나에게 던져진 칭찬들이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 그보다 적은 빈도였던 비난의 언어들이 나를 감싸기 시작한다. 나는 아침을 뜬 눈으로 맞이 했다.
그.래.도.
나는 감사하게도 예쁜 얼굴로 태어 났고 나를 사진으로 보기만 해도 좋아라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대문을 연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수십 명의 기자들이 어제의 식사 자리에 대해 물어본다. 메뉴 선택은 나의 생각이었는지, 식사를 마치고 화장실은 몇 분 뒤에 갔는지, 먼저 일어난 세 번째 사람에 대한 미안함은 전혀 없었는지.
그.러.더.니.
나를 찾는 사람들이 줄어든다. 돌아간 기자들은 신나게 나에 대해 지껄이는 기사들을 남발하더니 이제 아무도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 그 흔했던 파파라치 하나가 없다. 인터넷에 내 이름을 쳐본다. 스크롤을 좀 내려야 나온다. 댓글을 본다. 연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댁들의 글을 더 이상 제 정신으로 볼 수가 없다.
나는 그렇게 점점 망실되어 갔고 밤은 더 깊어만 갔다.
그들은 나를 일일이 모욕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건 일일이 상처 받는 것 뿐이었다.
이 생에 난 아무것도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다.
묘하게 가라 앉아 있어서 한 때 흥미로워 했던, 음주 운전을 했다고 해서 차의 종류를 궁금하게 했던, 생활고에 시달린다고 해서 그래도 연예인인데 라는 생각을 가지게 했던 한 사람이 죽었다.
어제 나는 조금 먼 곳에서 추상적인 슬픔을 끌어올렸는데, 오늘 '민물장어의 꿈'을 들으며 돌아 오는 차안에서는 정말 구체적으로 먹먹했다.
누군가의 죽음은 주로 출생보다 슬프다.
나는 이제 경사 보다 조사가 더 많다. 조사는 꼭 가려 한다.
죽음은 보통 출생보다 외롭고 언제나 조금은 희뿌연 텅스텐 빛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십여 년 전.
한 학번 어렸던. 귀엽고 참 속이 깊고 따뜻했던 후배가 세상을 떠났다.
2살 된 딸이 하나 있는 엄마의 죽음이었다.
장례식장 곧곧에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아가야. 학교 갈 때 아빠 손 잡고 씩씩하게 갈 수 있지?'
'엄마는 조금 멀리 가는건데...'
'아가야. 세상에 좋은게 참 많은데 그걸 같이 못 봐서 엄마가 참 미안해'
글을 쓰다가 눈물이 나오기는 처음이다.
부디.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내. 인.생.이.나. 좀. 잘. 살.아.야. 한.다.는. 것.
죽음은 모든 것을 엄폐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실존하는 동안 가끔은 반드시 죽음의 면전에 서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