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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단상

by 하니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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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하지 않고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쉽다.
그러나 관찰하면서도 그 인간을 사랑하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노릇인가?

깊은 사색의 노력없이 단순 소박하기는 쉽다.
그러나 깊이 사색하려는 노력속에서 단순 소박한 사람이 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자기 기만을 감행해 가며 낙천적이기는 쉽다.
그러나 자기 기만없이 낙천적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어리석음을 증오하지 않는 자가 어리석은 인간을 혐오하지 않기는 쉽다.
그러나 어리석음을 증오하면서 어리석은 인간에게 애정을 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외롭지 않은 자가 온화하기란 쉽다.
그러나 속절없는 고립 속에서도 괴팍해지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리고 적개심과 원한을 가슴에 간직하면서 악과 부정의 비열을 증오하기는 쉽다.
그러나 원한 없이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악과 부정과 비열을 간절히 증오하기란
그 얼마나 어려운 노릇인가?


인간에 대한 단상.

- 서준식의 옥중서한 中 -




서준식(徐俊植, 1948~ )은 일본 출생의 진보 인권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이다.

1971년 '유학생 형제 간첩단 사건'으로 투옥되어 7년을 복역하고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전향을 거부한 이유로, 10년을 더 복역하고 1988년에 출감하였다.

이 책은 17년의 세월 동안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책으로 견딜 수 없는 고문과 회유 속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켜낸 한 인간의 기록이다.


이 문장은 처음 접했을 때 나의 옹졸함을 깊숙히 관통하여 찔러 준 내 인생에서 가장 깊은 문장으로 인간을 성찰하고 관계 속에서의 나를 재정립하고 싶을 때마다 꺼내 보게 되는 고귀한 글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얼핏 보면 따뜻하고 밝아 보이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인간에 대한 깊은 사유와 상대에 대한 연민이나 사랑이 부재한 부박하고 차가운 사람이 있다.

습관적 감탄사나 이모티콘식 가벼움으로 사람들에게 접근하며 호기심을 가장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 사이를 누비며 교묘하게 그 갈등을 조장하며 신나게 갈아 먹다가 상황에 대한 흥미를 잃거나 더 자극적인 전장을 발견하면 재빠르게 옷을 갈아 입고 놀랍도록 천박한 웃음을 흘리며 또 다른 갈등에 기생하여 싱싱한 피를 그 더러운 입에서 뚝뚝 흘린다. 여전히 배는 고프다.

오랫동안 지켜보고 상당히 깊게 관찰해 보지 않으면 그 기묘한 실체를 알 수 없는 사람.

자존감은 낮으며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줄 모르며 세상에는 입에 담아 물고 있어야 할 밀어와 두꺼운 비의가 존재함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잠깐 보면 순수하고 소박해 보이나 그것이 사색이나 관조의 부재에서 오는 공허한 단순함이며 기실 천박한 탐욕으로 점철되어 있어 선악과의 탐식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관계의 유지를 위해서 ‘진실’만을 말하지 않는다. 의례적인 치레로 진짜 생각을 덮는 기술을 쓰며 나와 상대의 미래를 허황되게 긍정하고, 흐려진 가능성에 의미를 과잉 부여하는 인사말을 산발하는데 그것은 습관적 자기 기만에서 나오는 당착이다. 빌드업된 낙천의 끝은 무서운 낙하. 그 이상은 없다.


한달 치 구매 영수증을 다림질판에 놓고 주름을 편다. 사무실 책상에 고이 펼쳐 반나절 넘게 계산기를 두드린다.

맞는데 맞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손해를 본 것 같다. 계산이 잘못 된 것 같다. 발견 즉시 나는 적토마에 올라타 적진으로 돌진할 것이다. 계산기 숫자 자판이 자꾸 희미해지다니. 이놈들 나를 속였다.

나는 오늘도 가족 경제의 안녕을 지킨다. 그런데 이런 나를 사람들이 자꾸 피한다. 모두 한통속이다!


나는 요즘 외롭다. 나는 그저 내 입장을 혹시 모를까봐 먼저 남들에게 설명해준 것 뿐이다.

남들이 불편하면 나도 불편하니까. 나는 더불어 사는 세상이 좋다.

복직하는 사무실 여동생의 병명은 모르지만 시간을 들여 긴히 인사과에 알려주고 왔다. 그녀는 사실 너무 아픈 아이라 불쌍하다고. 정보는 나누어야 하는 공공재니까.

참 편한 내 자리를 그녀가 아프다는 이유로 차지하여 나한테 미안해 할까봐 걱정이었다. 이 자리가 어떻게 획득한 귀한 자리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봐 나는 헤드셋을 벗는 수고를 더했다.

나는 오늘도 식당 구석에서 클래식을 들으며 혼자 밥을 먹는다.


우리는 모두 '결핍'의 총체이다. 영원이 부여되지 않는 너와 나는 어차피 인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같이 살아가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말과 행동을 통한 소통 활동을 멈출 수 없다.

우리는 나약해서 쉽게 미워하고 증오하고 아파한다.

'분노'는 '이해'의 부족에서 나오지만 자기만 옳다는 생각을 조금 넣어두면 결국 '이해'를 통해 '분노'를 사라지게 할 수 있다.

누군가의 아픔은 누군가에서 비롯되고 결국 어느 누군가는 그 아픔의 총량을 받아내야 한다.

우리 각자가 가장 나다울 때, 너와 내가 가장 서로의 나다움으로 소통하는 그런 빛나는 개인들이 살만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적의와 원한을 넣어 두고 '나는 잘 살고 있는가?', '나는 너에게 연탄재를 뿌릴 자격이 있는가?'를 반성해 보는 '하루 중 5분의 자기 성찰 시간'을 가져 본다면.

결핍이 남긴 '공허'가 아닌 '흔적'을 되돌아 볼 수 있다면 결국 '나는 사랑받고 싶은 것'이라는 마음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악과 부정과 비열을 간절히 증오하며 고통 속에서 계속 살기는 어렵지 않을까?


희뿌연 추상과 집단적 정열에 몸을 내맡기는 '안락한 보수의 계절'이 지나가고 인간 현실의 무한한 복잡함을 정직하게 직시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사랑을 다시 복원할 수 있는 '고귀한 사랑의 계절'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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