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셀미 Jul 06. 2024

더 깊이, 숨을 참고

DAY9. 길리 바다에서 다이빙에 눈을 뜨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수속성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행지를 정할 때 바다와 숙소 수영장 유무는 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 내가 물의 매력을 알게 된 건 작년, 발리의 한 호텔 수영장에서였다. 약 2주간의 고된 출장 일정을 마치고 잠시 몸을 담갔던 그곳에서 마치 고진감래와도 같은 짜릿한 물맛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약 1년 후, 발리로 돌아온 '인간물개 지망생'은 눈 두는 곳마다 바다가 보이는 길리를 천국으로 여기며 하루에도 몇 번씩 바다에 뛰어들었다.

 스노클링 투어에 가기 위해 아침 7시부터 체크아웃을 하고 항구로 나다. 하늘에 구름이 가득해 비가 올까 걱정이었다. 바닷속 시야가 좋아야 할 텐데.


 "어제도 아침에 비가 왔는데, 물고기 잘 보였어. 걱정 마"


 경험에서 우러나온 가이드의 말에 믿음이 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하나 둘, 동행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투어 가격을 낮추기 위해 여행 카페 등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모은 무리였다. 나 포함 총 일곱. 그중 넷은 가족 여행 그룹이었고 셋은 혼자 여행자였다. 20대부터 60대까지 연령대도 다양했지만, 바닷속에 뛰어들어 물고기와 거북이를 만나겠다는 목표만은 같았다.

첫 번째로 도착한 스팟은 오토바이 무덤이었다. 바다 바닥에 박혀 녹과 이끼가 잔뜩 슬어버린 오토바이 사이로 물고기 떼가 유유히 지나다녔다. 이 오토바이들은 어떤 경로로 이곳에 잠기게 된 걸까. 궁금했지만 물어볼 틈이 없었다. 수면 위에 둥둥 떠있던 나의 팔을 잡고 가이드가 숫자를 세기 시작한 것이다.


"3, 2, 1."


 그러더니 쑤욱, 오토바이가 묻혀 있는 바다 깊숙이까지 나를 끌고 갔다. 다이빙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깊은 물속에 잠겨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느 한 지점을 지나자 귀에서 지지직 소리가 났다. 그 와중에도 가이드의 안내에 착실히 따라 어찌어찌 '라이더처럼 사진 찍기' 미션을 수행했는데, 사진 속 표정에 당시의 감정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당장 올라가지 않으면 익사할지도 몰라.'


수면 위로 급하게 올라 오니 귀가 먹먹하고 아팠다. 이게 무슨 느낌이지? 다이빙에 익숙해 보이는 동행에게 물으니 바로 답이 돌아왔다.


"이퀄라이징이 잘 안 돼서 그래요."

"그건 어떻게 하는 건데요?"

"귀로 공기 빼는 느낌을 계속 유지하면 돼요."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동행도 거들었다.


"이퀄라이징 잘못하면 고막 나갈 수도 있어요."


헉. 잠수란 생각보다 고난도의 기술이었구나. 살짝 겁을 먹은 채, 자유롭게 바닷속을 유영하는 동행들을 보고 있자니 부러워졌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그들처럼 깊숙이 잠수하려 시도해 봤지만, 쉽지 않았다. 몸이 자꾸만 둥둥 떴다.


"앞을 보려 하지 말고, 아래를 봐야 해요."


그러니까, 그게 잘 안 된다니까요. 오기가 발동되었고, 관심도 없던 다이빙 세계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비록 지금은 수면 위에서 물고기의 움직임만 관찰하는 '인간물개 지망생' 신세지만, 다음엔 꼭 그들 사이에서 함께 헤엄칠 수 있는 진정한 '인간물개'로 돌아오리라.


헤엄 기술을 배우고자 마음먹은 데에는 물을 대하는 스스로의 태도가 점점 과감해지는 문제도 있었다. 그 점은 바다에 뛰어들 때에도 드러났다. 이전 같으면 구명조끼를 입고 사다리를 타고 조심조심 내려갔을 텐데, 이젠 튜브도 사다리도 없이 멋지게 뛰어들고 싶었다. 겁 없이 한 번 시도했다가 물을 먹고 바로 공포감이 되살아났지만... 자꾸 용감해지는 태도를 책임지려면 수영과 다이빙 기술을 연마할 필요성이 있었다.

물놀이에 점점 지쳐갈 무렵, 한 섬에 닿았다. 길리 트라왕안 바로 옆에 위치한 길리 메노, 일명 길리M이었다. 길리T보다는 섬 크기가 조금 더 작았다.


해변의 카페에 앉아 과일 주스 한 잔씩을 손에 들고 동행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가족 여행자 중 한 명이었던 50대 여성분은 혼자 여행자인 우리에게 한참이나 질문을 던졌다.


'잠은 어디서 자냐, 밥은 어떻게 냐, 영어가 안 되면 어떡하냐, 무섭진 않냐.'


충분한 대답을 듣고 난 뒤, 녀는 별안간 옆에 있던 가족들에게 선언했다.


"나 세계여행을 떠나야겠어."


그 결심의 시작을 함께한 자로서, 그것이 구체화되고 현실이 되어 이뤄질 날을 응원한다.

섬의 한 구역에서는 아기 거북이를 키우고 있었다. 어미 거북이가 낳은 알을 안전한 장소에서 부화시키고 어느 정도 몸집이 자라면 바다로 돌려보낸다고 했다. 조그마한 것들도 거북이라고, 손과 발을 열심히 움직이며 헤엄치는 모습이 귀여웠다. 무사히 자라 바닷속에서 자유롭게, 여유롭게 헤엄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부함에 루피아를 탈탈 털어 넣었다.


문과생의 머릿속에선, 거북이가 성장할수록 단단한 등껍질도 함께 자라난다는 것이 꽤 신기하게 느껴진다. 소라게의 소라껍데기처럼 입고 벗을 수 있는 갑옷 같은 건 줄 알았다. 만약 인간도 거북이 등껍질 같은 단단한 장비(?)를 하나쯤 달고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몸, 정신과 함께 자라나는 방패가 언제고 날 지키고 있다면, 두려울 땐  하고 숨어버릴 수 있는 방패가 늘 곁에 있다면, 오히려 조금은 더 과감하고 용감해졌을지도 모른다.

스노클링을 마치고 길리T로 돌아오니 배가 너무 고팠다. 혼자 여행자인 J, S와 함께 쫄딱 젖은 채로 나란히 항구 앞 식당으로 향했다. 아마도, 길리에서 먹었던 가장 사치스러운 식사일 거다. 사진 속 햄버거 세트가 무려 190K 루피아(한국돈 약 16,000원)였다. 굶주리고 지쳐서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기에 내릴 수 있던 메뉴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선택이 무색하게도, 배를 채우고 나니 바다 위에서 느낀 굶주림과 배고픔은 싹 잊혀지고, 다시 바다에 들어가고 싶어졌다. 어제 같이 피자를 먹은 동행들에게 연락하니 바닷가 앞 카페에 있다고 했다. 마침 그곳이 J의 숙소 바로 앞이었기에 함께 그곳으로 향했다.


<SUNRISE BREAKFAST>. 테이블과 썬베드 자리가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어 수영 후 간단한 식사를 하기에도, 바다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몸을 굽기에도 마땅한 곳이었다. 직원들의 친근한 웃음까지 합세해 나와 내 동행들의 마음을 빼앗은 이 카페는 4일 동안 우리의 아지트가 되어 주었다. 각자 아침에 일어나는 대로, 별다른 약속이 없어도 모두가 이곳에 모였다. 몇 시간이고 자리에 죽치고 앉아, 밥->수영->썬텐->음료->밥으로 이어지는 길리의 단조롭지만 풍요로운 일상을 함께 즐겼다. 그 시간들이, 우리를 알아보며 인사를 건네던 직원들의 밝은 미소가 그립다.

저녁엔 항구 앞에 있는 길리 나이트 마켓에 갔다. 맛있다고 추천받은 생선구이를 주문했는데, 양념을 발라 구운 생선과 함께 밥과 간단한 반찬 나왔다. 우붓의 나시짬뿌르가 생각이 났다. 인도네시아도 백반차림을 선호하는 걸까. 한국의 식문화와 공유되는 감성이 있는 것 같다.


야시장 내부가 매우 덥고 습했기 때문에 땀을 뻘뻘 흘리며 음식을 먹었다. 방문객들의 얼굴에서 땀과 함께 웃음기마저 흘러내릴 때쯤, 시장 한가운데 서서 흥을 돋우는 이가 있었다.

기타를 메고 버스킹을 하는 한 남자였다. 화려한 무대가 아니었기에, 그를 주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상관없다는 듯 흥에 취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딱 한 번 호응을 보냈을 뿐인데,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이름을 물어왔다. 대답해 주었더니, 가사에 내 이름을 넣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단연코, 길리 나이트 마켓에 내 이름이 울려 퍼지는 일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나가기 전 팁을 잊지 않았고, 남자는 내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더 크게 내 이름이 담긴 노래를 불러 주었다.

길리에서의 기분은 온전히 내 선택에 달려있었다. 누구도 나를 함부로 침범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만을 스스로 선택하면 되었다. 만약 이름을 불러대는 남자에 불쾌하고 당황스러웠다면 그것이 그날의 내 기분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재밌고 유쾌한 해프닝으로 생각했기에 내 기분은 즐겁기만 했다.


그렇기에 길리에서는 좋은 기분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쉬웠다. 어차피 당장 해야 할 같은 다. 오로지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 었다. 내가 선택한 행위를 즐겁게 하지  이유가 무엇 있겠는가. 중간중간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만나도, 뜻대로 잘 풀리지 않아도 그것은 그냥 과정일 뿐, 부정적인 감정이 들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웃으면 복이 와요'처럼, 그냥 계속 웃기만 했고 그러니까 계속 기분이 좋았다. 너무 단순하고 당연한 명제이지만 현실에서는 이뤄지기 힘든 그것이, 길리에서는 그토록 쉬웠다.

이전 08화 모여있는 곳엔 거북이가 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