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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미 Jun 25. 2024

그 섬과의 첫 만남

DAY7. 길리에 입도하다

  지금부터 써 내려가는 글의 장르는 로맨스다. 지역과 사랑에 빠져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 감정을 이번에 겪었다. 발리 옆에 위치한, 인도네시아의 또 다른 섬 롬복. 그리고 그 옆에 달려 있는 '작은 섬, 길리 트리왕안'이 바로 그 대상이다. 일주일 남짓 머물렀던 시간 동안 얼마나 깊은 감정을 주어버린 것인지, 떠나온 지 세 달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도 그 마음을 다 털어내지 못했다.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7일간의 추억을 모두 정리하고 나면, 그리움을 달랠 수 있을까. 바라는 마음으로 여행기를 적어 내려간다.

 DAY7의 하루는 '기다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우붓의 다음 목적지인 길리 트리왕안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선 빠당바이 항구까지 가야 했고, 아침 일찍 픽업 차량이 숙소 앞까지 오기로 되어 있었다. 조식도 포기하고 일찌감치 짐을 싸 기다리는데, 30분이 지나도록 차가 오지 않았다. 바로 전날 탑승권을 예매했었기 때문에 혹시 누락이 된 건 아닐까, 그래서 배를 못 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조바심이 들었다.


배낭을 이고 초조한 얼굴로 서성이는 내가 걱정이 되었는지, 숙소 사장님의 온 가족이 기다림에 동참했다.


"아직도 차가 안 왔어?"

"네, 아직..."

"전화 걸어 봐. 대신 이야기해 줄게."


 세 번쯤의 통화가 지나고 나서야, 드디어 픽업 차가 도착했다. 늦게 도착한 주제에 얼른 타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사장님 가족에게 제대로 된 고마움의 마음을 전하지 못해 메신저로 인사를 남겼다. 다음에 또 만나자는 대답이 돌아왔다.

빠당바이 항구에 도착해 드디어 바다를 만났다. 우붓에 있는 시간 내내 바다가 그리웠기 때문에 오랜 기다림에 지쳐 있던 마음이 삽시간에 벅차올랐다.

배를 타고 2시간 정도 달리자, 바다의 빛깔이 점점 에메랄드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길리 트리왕안에 당도한 것이다. 목적지에 대한 공부라곤 하나도 해두지 않은 탓에, 도착마자마자 어리둥절한 상태로 입도세 20k루피아(한국 돈 약 1,600원)를 뜯겼다. 항구를 벗어나자, 이번엔 치모도(말마차) 흥정꾼들의 타깃으로 노려졌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이 섬에는 차도, 스쿠터도 다니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전거로 대략 2-3시간 정도면 돌아볼 수 있는 섬이기 때문일까, 이동수단은 말이 끄는 마차인 치모도, 자전거, 그리고 두 다리뿐이었다. 입도하자마자 흥정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던 나는 숙소까지 과감히 걸어가는 방법을 택했다.


태양빛의 농도가 확실히 우붓보다 짙었다. 도로는 잘 정비되어 있지 않아 곳곳이 흙탕물 지뢰이 었다. 좁은 골목길 사이로 갑자기 튀어나오는 치모도들은 마음을 혼란하게 했다.

이토록 정신없는 곳에서 며칠이나 지낼 수 있을까, 그것이 길리에게 느낀 첫인상이었다.

체크인을 마치곤 바로 이동 수단을 마련했다. 하루 대여료 50k(한국돈 약 4,200원)의 자전거.

길리에 오면 무조건 자전거를 타야 한다고 외치겠다. 만약, 자전거 타는 법을 모른다면 배워서라도 오라고 권하고 싶다. 자전거 주는 기동력 덕에 동네 누비듯 길리의 곳곳을 다닐 수 있었고 덕분에 길리의 매력을 양껏 느낄 수 있었다.

배고픔과 더위에 지쳐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숙소 근처 아무 식당에나 들어갔다. 음식을 시키고 멍하니 기다리는데, 눈앞으로 염소 무리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킥킥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말 다음에 염소라니.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동네였다. 파리와 싸우며 먹은, 길리에서의 첫 식사였던 미고랭은 꽤 맛있었다. 함께한 시원한 맥주 한 잔이 이때의 나를 살렸다.

길리 트리왕안에는 에어컨이 있는 카페나 레스토랑이 많지 않다. 대부분 야장을 추구한다. 길리에서 가장 시원한 장소 세 곳만 뽑으라고 하면 숙소 방 안, 편의점, 바닷속을 말하겠다. 특히 항구가 있는 동쪽엔 에어컨 달린 카페가 두 군데뿐이다. 그중 가장 정을 주며 들렀던 카페 <카르페 디엠>은 첫날부터 운 좋게 발견해 들어간 곳이었다. 시원한 바람 아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켜니 이제야 여유가 생겨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뜬금없이 네일숍에 갔다. 평소 답답함을 싫어하기 때문에 손톱 발톱엔 색을 들이지 않는 편이지만, 길리에서는 그러고 싶었다. 그것이 이 섬에 어울리는 차림인 것 같았다.


전문적이라고는 전혀 말할 수 없지만, 정성이 들어간 네일 아트(?). 한 땀 한 땀 열심히 칠한 다음선풍기로 고이 말려 주었다. 발톱에는 아직 색이 남아 있는데, 길리의 흔적 같아 차마 지우지 못했다. 첫눈이 내릴 때까지 봉숭아물이 남아있길 바라는 마음처럼.

바투르산에서 함께 일출을 맞이했던 Y언니와 우연히 연락이 닿았다. 언니도 마침 길리에 와 있다고 했다. 지속되는 우연으로 가지는 세 번째 만남이라니. 이 정도면 인연이었을까.


길리에 온 지 이미 며칠이 지났다는 언니는, 섬 서쪽 가이드를 자처했다. 언니를 따라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으니 또 다른 풍경을 지닌 길리의 서쪽이 나타났다. 항구와 온갖 바, 카페, 레스토랑이 몰려있는 동쪽이 흥의 공간이라면, 리조트가 몰려 있는 서쪽은 힐링의 공간이었다.

치모도를 모느라 지쳤을 말과 마부가 바다를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잠시 일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 이런 풍경이라면, 그에게 이곳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을까. 마치 내가 사무실 테라스에 올라 남산을 바라보는 마음과 같을까.

식탁으로 고양이가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뻔뻔스레 합석했다. 남긴 생선구이를 밀어주니 맛있게 먹는 모습이 익숙해 보였다. 이것이 네가 먹고사는 방법이로구나.


길리에는 고양이가 많이 보이는 반면, 개는 한 마리도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이 길리 사람들이 고양이에게 지키는 예의라고 들었다. 원래 고양이가 차지하고 살던 섬임을 존중해서, 그의 앙숙인 개는 데려오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라고.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매력적인 영화관을 발견했다. 바다를 배경으로 빈백에 늘어져 앉아, 칵테일을 마시며 영화를 볼 수 있는 곳. 빈백에 누워 해가 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곳이 천국이구나 싶었다.

한참 영화를 보고 있는데, 갑작스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숙소까지는 2-30분 정도 자전거를 타고 달려야 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전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길리를 떠나는 Y언니와는 골목길에서 갈라지며 아쉬운 작별 인사를 했다.


숙소 침대에 누워 있으니, 웃음이 실실 났다. 오늘 별 것도 안 했는데, 이 채워진 듯한 기분은 뭘까.

참 묘한 동네야. 그것이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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