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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미 Jun 17. 2024

서두를수록 늦어지는 곳

DAY5. 몸을 말렸더니 비가 왔다

바투르산 투어를 함께했던 S, 수영장 카페에 함께 갔던 E, 그리고 새로운 인물 A언니까지. 나 포함 네 사람이 모였다. 회동 시간은 오전 8시. 장소는 우붓의 제일가는 핫 플레이스라는 <크레타야 우붓>.


약속 시간이 가까워지자 한 사람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그랩 바이크를 타고 수영복 차림을 한 채였다.  

크레타야 우붓은 배경으로 계단식 논인 뜨갈랑랑이 펼쳐진 수영장 겸, 카페 겸, 레스토랑이다.


입장료는 단돈 50k루피아 (한국돈 약 4,500원). 홈페이지에서 미리 테이블 예약을 할 수 있고, 워크인 또한 가능하다.


우리는 미니멀 차지 없는 테이블에 자리 잡을 계획이었기 때문에 오픈런을 감행했다. 그 덕에 입장했을 무렵에는 사람이 붐비지 않아 원하는 자리를 잡은 것은 물론, 멋진 배경과 각도로 마음껏 인생샷을 남길 수 있었다. 사진 찍히는 걸 그다지 즐기지 않지만, 발리까지 왔으니 사진 데이를 하루쯤은 만들어도 좋을 것 같았다.

시원한 물에서 수영을 하고, 지치면 나와서 시켜둔 음식을 먹고, 온수풀에 들어가 몸을 지지고, 햇빛을 쬐며 몸을 말리고.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않고 오로지 현재의 컨디션과 기분에 따라 움직이는 곳. 모두가 함께 여유로웠다.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주제는 오로지 발리. 여행한 지 오래된 이는 그동안 쌓아둔 경험과 정보를 나눠 주었고, 이제 막 여행을 시작한 이는 귀를 열고 열심히 들으며 설렘을 키웠다.

그러다 정말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몸을 말리고 각자의 목적지로 해산하려던 때였다. 미리 잡혀있던 예약이 있던 몇 명은 먼저 떠났고, 나머지는 앉아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빗속 온수풀을 즐기지 못했던 것이 지금 생각하니 조금 아쉽다.


한 시간 정도 멍하니 비 내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조금씩 빗방울이 잦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다음 목적지인 립 맛집에 가기 위해 급히 그랩 바이크를 잡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고난을 만났다.


우붓은 기본적으로 골목길이 좁다. 대부분 차 한 대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다. 그 길이 양쪽에서 맞닥뜨린 차로 인해 꽉 꽉 막혀 버린 것이다.


오토바이조차 지나갈 수 없는 좁은 길이었기에 가만히 앉아 해결되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멈춘 줄 알았던 빗방울이 조금씩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까처럼 쏟아지면 앉은자리에서 쫄딱 젖을 수밖에 없을 거다. 마음이 급했다.


"길이 쉽게 뚫릴 것 같진 않지?"

"아마도..."

"나 여기서 내려서 걸어갈게."

"그래주면 땡큐!"


립 맛집까지는 남은 거리는 오토바이로 1분, 도보 5분 정도였기 때문에 비가 쏟아지기 전 걸어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하늘이 나를 놀리기로 작정했던 걸까. 1분 남짓 걸었을 때부터 비가 미친 듯이 쏟아붓기 시작했다. 문득 뒤를 돌아 아까의 교통체증이 있던 자리를 보았는데, 이미 시원하게 뻥 뚫려 있었다.


발 닿는 곳마다 작은 계곡이 생겼다. 쪼리가 휩쓸려 내려가진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 비 사이에, 우비와 우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내가 서 있었다. 게다가 휴대폰마저 배터리 부족으로 꺼지고 말았다. 오로지 감으로 립 맛집을 찾아야 했다. 난 지도가 없으면 길을 찾지 못하는 길치인데.


결국 편의점을 몇 군데 돌아 겨우 우비를 구했다. 립 맛집 찾기는 이미 포기했다. 목적은 숙소까지 무사히 걸어가기로 바뀌었다.

큰길로 나오자 다행히 비가 조금씩 멎기 시작했다. 쫄딱 젖은 생쥐꼴이 되어 쏟아지는 여행자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철퍽철퍽 물 먹은 쪼리를 끌고 걸으며 생각했다.


'크레타야에서 조금만 더 있다 나올걸...'

'오토바이에서 조금만 더 기다릴걸...'

'편의점에서 조금만 시간 때울걸...'


그러니까, 조금만 더 여유롭게 늦장 부려볼걸. 서두르다가 오히려 늦어지고 목적지에도 가지 못하다니.

바쁠 것 뭐 있다고, 해탈하는 마음으로 조금만 더 기다려볼걸.

몸을 다시 말리곤, 어느 락밴드가 열심히 열창하는 바 <NO MAS>에 갔다. 관객과 하나 되어 현재를 즐기는 그들을 보며 빗속의 나를 떠올렸다.


여행은 빨리빨리 급하게 살아가는 나를 종종 부끄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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